아빠를 위로하던 "치맥, 콜?"... 더이상 오지 않는 딸의 문자 [이태원참사_희생자]

이주연 2023. 4. 2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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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6시 34분] 옷으로 '이야기' 전하려 했던, 아름답게 빛나던 박가영씨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이주연, 유성호 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아버지 박계순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의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유성호

유독 춥거나, 유독 더운 날 박가영(21)씨는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치맥, 콜?"

그렇게 마주앉아 맥주 한 잔을 나눴다. 가족 내 유일한 술친구였다. 30년 동안 자동차 정비일을 해 온 아빠의 고단함을 안 가영씨 나름의 마음 표현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한 잔 하러가자"며 엄마와 치킨집에 가 콜라를 시켜놓고 수다를 떨던 딸이었다. 엄마 나이 서른에 낳아 스무해 키운 딸은 진즉부터 친구 같았다. 엄마는 "아침부터 농담을 시작하면 저녁 때까지 내리 떠들어도 그렇게 즐거웠다"고 했다.

아름다울 가, 빛 날 영. 가영은 이름대로 아름답게 빛나던 아이였다. 유쾌하고 강단 있었다. 아빠가 옥편을 뒤져가며 지은 이름이다. 으레 친할아버지가 지었을 이름을 아빠가 지은 건, 가영이 어렵게 가진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했다.

결혼하자마자 엄마 자궁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자궁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아기를 못 가질 거라고 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호르몬 주사도 맞고, 배란 주사도 맞고, 시술도 했다. 햇수로 3년을 매달렸다. 그러다, '포기하자' 한 그 달 가영씨가 찾아왔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딸은 바닥에 내려놓을 일 없이 컸다. 시댁에서 첫째 손녀, 친정에서는 고명딸이었다. 증조할머니도 살아계셨고, 친할머니·친할아버지에 작은할아버지·작은할머니, 외할아버지·외할머니 모두 "이루 말할 수 없게 가영이를 예뻐"했다. 어른들이 '우쭈쭈' 해주시기에, 가영의 엄마·아빠는 도리를 가르쳤다.

"'할아버지 은행'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용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용돈을 받으면 적어도 세 번에 한 번은 뭐라도 대접해드려라'라고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혼자 부산 여행을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라~' 해놓고 몰래 뒤를 따라다녔죠. 그러다 가영이한테 걸렸어요(웃음). 그 뒤로 각자 여행하자기에 집에 돌아와서 만났는데, 부산 어묵을 한 보따리 사온 거예요. 외가·친가에 빠짐없이 싹 돌렸어요."(엄마)

"그래, 해봐~" 역시 부모님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다.

"해보고 안 될 수도 있고, 잘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무조건 '안 돼' 해버리면 시작도 못해요. 그래서 되든 안 되든 해봐, 그렇게 말해줬었죠." (엄마)

가영이가 가고 보름 뒤, 합격 통보서가 날아왔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가 생전에 어머니 최선미씨와 함께 찍은 사진.ⓒ 유성호

지난 26일, 아빠의 가게에서 만난 엄마 최선미씨와 아빠 박계순씨는 가영이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길 바랐다고 했다. 피아노·바이올린·첼로·가야금·댄스 스포츠·과학·합기도·미술 해볼만한 건 다 시켜봤다. 가영이 택한 건 그 중 가장 못했던 미술이었다.

"7살 때부터 2년을 미술학원을 보냈는데, 학교 선생님이 '미술 학원을 보내셔야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그만뒀죠. 그림 그린 걸 보면 '어이구야' 하게 되는데 가영이가 하나하나 설명하면 나름의 스토리가 있더라고요. 제일 못한 게 미술인데 결국 자기 의지로 미술 쪽을 진로로 택했죠." (엄마)

가영은 장래희망을 중학생 때 정했다. 목원대 패션디자인학과 학생들이 패션쇼를 하는 걸 TV로 보고 매료됐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였다. 가영은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옷으로 전하고 싶다"고 했다.

굳은 마음은 그림 실력이 모자라도, 학교 성적이 부족해도 꺾이지 않았다. 입시 미술 선생님이 "솔직히 대학가기 어려울 거 같다"고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3시간 수업 들을 거 6시간, 9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난 될 거야" 자신하던 가영은 정말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가영씨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캐나다 학교로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뉴욕으로 넘어가 패션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유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도 12시간씩 일했다. "엄마가 내줄게"해도 "엄마 도움도 받겠지만, 그것만으로 유학을 가는 건 맞지 않다"며 세 번의 방학을 오롯이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명절에도 알바비가 더 나온다며 근무를 자처했다. 편의점, 햄버거 가게, 마트, 감자탕 가게, 가릴 것 없이 했다. 2022년 10월 29일, 사고가 난 그 날에도 학교에서 치르는 수시 시험 감독을 돕는 알바를 했다. 며칠 뒤 알바비가 들어왔다. 7만 9000원. 가영이가 써보지도 못하고 간 돈이 1400만 원에 달했다. 가영이가 지원했던 캐나다 학교에서는 가영이 떠나고 보름 후 합격 통보를 보내왔다.

세월호 때 외숙모 잃고, 이제 딸을 잃은 아빠... "또 유가족이 될지 몰랐네요"

▲ 이태원 참사 고 박가영씨 부모 "카네이션 한 번 못 달아봤는데..." ⓒ 유성호

10월 29일, 가영은 친구와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자율적으로 혼자 결정할 수 있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거까지 물어보고 행동하게 했어야 했나, 이태원을 못 가게 했어야 하나, 온갖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

가영이 떠난 지 벌써 6개월. 5월이 다가오니 엄마는 마음이 아리다. 가영이가 준 카네이션을 한 번도 가슴팍에 달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양가 어르신이 많으니까, 유치원 때 카네이션을 만들어와도 할아버지·할머니 먼저 챙기라고 했죠. 커서도 가영이가 어버이날 때 꼭 할아버지·할머니한테 편지 쓰고 선물하고 그랬는데, 젊은 제가 뭘 꽂고 다니기가 뭐해서 전 항상 뒷전이었거든요. 그게 이제사 아쉬워요."

그 어르신들이 2021년부터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가영의 증조할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가시고 이제 친할아버지 한 분 남아계신다. 엄마는, 가영의 사고가 나자 가신 분들을 향한 원망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가영이를 예뻐하셨으면, 가영이가 오지 못하게 하셨어야지... 친정 엄마 돌아가시고 유품 몇 개를 가영이가 썼는데 그거 때문에 그랬나, 자꾸 나에게서, 내 주변에서 원인을 찾게 되더라고요. 미치겠었어요. '왜 이렇게 됐지'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아빠도 자책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때 외숙모를 잃었어요. 그런데 또 유족이 될지 몰랐네요. 외숙모는 일반인 희생자라 학생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 모임이 나뉘어졌었죠. 그게 마음이 안 좋아서 유가족 활동에 참여를 많이 안 했어요. 그 때 나도 열심히 참여해서 참사 특별법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가영이 사고가 안 났을까... 후회되더라고요."

자꾸 '나'에게서 원인을 찾던 엄마·아빠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첫 기자회견(관련기사 : "무능한 정부에 아들 뺏겼지만... 무능한 엄마 되지 않겠다")을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참사구나, 원인이 정부에 있구나. 그 원인을 밝히면 내 아이 명예가 회복되겠구나."

가영의 죽음은 물음표 투성이었다. 10월 30일 새벽 1시 반 엄마는 구급대원과 통화를 했다. "순천향대학병원으로 가영이를 이송하고 있다"고, "가영이 사망했다"고 했다. 그 길로 엄마·아빠는 차를 몰고 내달렸다. 충남 홍성에서 서울까지 135km를 1시간 만에 주파했다. 병원에서는 출입을 막아섰다. 12시간 넘게 병원 앞에서 대기했다. 시신이 자꾸 구급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겨우 겨우 수소문해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날 새벽 구급차에 가영이 친구도 타고 있었어요. 연고자도 있었고 구급일지를 작성한 구급대원도 있었고, 구급일지에 우리 전화번호도 가영이 이름도 다 적혀있었는데 '무연고자'로 신원확인을 해야 한다며 12시간만에 아이를 찾게 한 거예요. 가영이를 병원에 데려다 준 구급대원이 이후에 몇 명이나 옮겼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가영이를 내려놓고 거기 계속 있었대요. 다시 현장에 나가서 누굴 구한 게 아니라, 시신을 분산배치해야 하니 대기를 시킨 거예요. 도대체 왜 아이들을 다 떼어놓은 걸까요. 누가 시킨 걸까요." (엄마)

서울에 도착한 지 14시간 만에 아이를 만났다. 손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지만 못 만지게 했다.

"한 엄마는 병원 관계자가 자리를 피해주며 둘이 있게 해줬대요. 그래서 샅샅이 봤대요. 왼쪽 가슴 밑에 요만큼 절개된 부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뭘까, 유일하게 그 엄마만 본 거예요. 그걸 못 본 엄마들은 '내 새끼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울화통이 터지는 거죠. 왜 애들한테 손도 못 대게 한 건지..."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된 엄마, "남은 애들 지켜야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어머니 최선미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유성호

'왜'가 쌓여가, 그 타래를 풀기 위해 나선 엄마는 '가영이 엄마'가 직업이 됐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서울과 홍성을 오가며 기자회견, 1인 시위, 서울 시청 앞 분향소 지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11월부터 줄기차게 해 온 얘기예요. 독립적 조사기구가 출범해야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잖아요. 내 새끼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쓰러졌나 CCTV를 보여달라고 해도 그걸 안 보여줘요. 자료가 없대요.

제가 이렇게 매달리는 건, 내 새끼 한 명(가영씨 남동생) 살아있는 것도 이유지만, 남의 새끼도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세월호 엄마들은 이태원 참사 나고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었대요. 다시 4월 16일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죠. 또 참사가 나면 견딜 수 있을까요. 이만큼의 슬픔에 또 이만큼의 슬픔이 더해져요. 그러니 남은 애들 지켜야죠. 결국 나를 지키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정부와 여당은 '묵묵부답'으로 답을 내놓고 있었다.

"시청 분향소 차렸다고 서울시에서 계고장이 날라오고 유족한테 변상금을 부과했죠. 영정사진에 그늘막 안 지게 차광막을 씌우려고 했더니 그것마저도 안 된대요. 시골 사는 엄마들 냉이 좀 캐서 나누려 가져와도 그 가방을 뒤져요. 김밥 싸와도 그걸 사진 찍어서 서울시에 보고한대요. 2분이면 오세훈 시장이 내려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우린 보이지 않나봐요.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여야 합의로 할 것처럼 하더니 야 4당이 발의하게 해놓고 나몰라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하나도 안 보여요." (엄마)

답답함에, 조바심에 유가족들은 하나 둘씩 지쳐가고 있다고 했다. 가영의 사고 후, 엄마는 체중이 25kg 이상 빠졌다. 하얗던 낯빛도 검어졌다.

"애간장이 녹아서 그래요. 뭐라도 조금 먹으면 위가 아프고 당이 300씩 올라가요. 시청 현장에서 쓰러졌었는데 혈압이 220 나왔어요. 이제 제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큰 암에 걸려서 (빨리) 병사하는 거예요. 종교를 가진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그럼 우리 가영이를 못 만나잖아요."

엄마의 이 말에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빠의 바람은 하나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잘 만들어서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가영이 만났을 때, '아빠 잘했어, 아빠 덕분에 나라가 살기 좋아졌어' 이 말을 꼭 듣고싶어요."

엄마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벌써 세 번째에요. 개인 책임이라고 넘겨버리면 참사는 언제든 일어나고 또 일어날 거예요. 나라에 세금 내는 건 이런 일이 있을 때 안전하게 보호받으려고 내는 거잖아요. 지금 싸우고 있는 저희에게 '언제까지 울 거냐' 그러지 말고, 시간이 걸려도 버틸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박가영씨의 부모인 박계순씨와 최선미씨가 26일 오후 충청남도 홍성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의 꿈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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