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잠겼지만 소리는 남았다... 김덕수 배출한 풍물의 고장 [월간 옥이네]

월간 옥이네 2023. 4. 2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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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로 인해 막지리 주민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막지리 풍물도 점차 수그러드는 듯싶었다.

마을을 나가 각지로 흩어진 주민들이 막지리에서 놀던 풍물을 곳곳에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마을 사람이 막지리에 다시 모였음을 알리고, 각자의 회한을 쓰다듬는 기막힌 풍물 소리가 이 행사의 백미였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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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군북면 막지리 사람들의 진심... "고향 역사를 지킨다는 건, 누군가의 뿌리 지키는 일"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막지리 맥기쉼터 앞 이수길(왼쪽)씨와 강천호씨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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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마을의 기적같은 이야기 "보시게, 아직 잠기지 않은 게 있어" https://omn.kr/23nrs

옥천 곳곳 핏줄처럼 흐르는 막지리 장단

수몰로 인해 막지리 주민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막지리 풍물도 점차 수그러드는 듯싶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마을을 나가 각지로 흩어진 주민들이 막지리에서 놀던 풍물을 곳곳에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강천호씨의 형님 고 강만호씨다.

"김봉학씨가 상쇠를 잡으면 함께 어울리며 장구 치던 사람이 강만호씨예요. 강만호씨는 장구를 주로 치던 사람이었고, 상쇠도 잘했어요. 수몰되고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가 전처럼 풍물을 치지 못하던 때는 강만호씨가 옥천 전역을 돌면서 풍물을 가르치러 다녔어요." (이수길씨)

강만호씨의 친동생 강천호씨도 풍물과 형님에 얽힌 기억 한 자락을 풀어놓는다.

"1979년 충북농악제에 막지리에 사는 우리 삼 형제가 모두 대회에 나갔어요. 강금호, 강만호 그리고 나 세 사람이에요. 나는 원래 나가기로 한 사람이 아닌데 대회 전날에 형님들과 상쇠 김봉학씨가 나를 급히 부르는 거예요. 한 사람이 부족하다면서 느닷없이 내일 대회에 나가자고 하는 거지요. 연습이란 걸 할 시간이 어디 있나요. 늘상 듣던 대로 치는 거지. 나 같은 사람도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왔으니 막지리 사람이라면 풍물이 몸에 익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요." (강천호씨)

이어서 강천호씨는 이제는 볼 수 없는 강만호씨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다.

"형님 생각하면 장구 두드리는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나요. 남아있는 사진 한 장 없는데도, 그 장면만큼은 선명하지요. 신명이 나서는 신들린 듯 장구를 치곤 했는데, 어려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농악을 좋아하던 양반이었어요. 나중에 읍에 나가 살면서는 옥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풍물을 가르치고 보급했을 정도로." (강천호씨)

이후 강만호씨는 1987년부터 농악 교실을 운영하며 읍면에 풍물을 보급하고 오지 마을 자선 공연 등을 선보였다. 1993년에는 지역 민속 풍물의 맥을 잇기 위한 옥소리 풍물패를 창단하고 옥천국악협회 부회장, 안남면 겨울풍물교실, 청성 풍물교실, 동이초 우산분교, 이주민 한국어학당, 옥천농악회 등에서 지도 강사를 맡으며 막지리 풍물과 그 정신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보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04년에는 제5회 옥천예술인 상을, 2010년에는 문화부문 군민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강만호씨 차에는 언제나 장구며 꽹과리가 북적거렸어. 풍물을 애틋하게 여긴 만큼 고향 막지리를 사랑한 사람이니, 어디에서 가르쳤어도 충북 제일 막지리 풍물에 대한 자부심과 그 정신을 잊지 않았을 테지. 어찌 보면 막지리 풍물이 옥천 전역에 스며든 셈인 거야. 사물놀이의 대가라는 김덕수도 제 고향을 잊지 않으니, 결국 풍물과 막지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지." (이수길씨)

"흩어진 수몰민 중 풍물을 가르치는 사람이 강만호씨뿐만은 아니에요. 우리 아래 세대에 권종현 씨도 청성에서 풍물을 가르치는 걸로 알고, 손용산씨는 막지리가 내려 보이는 소정리에 자리를 잡고 전통 타악기 채를 연구하고 만드는 '뿌리공예'를 운영하다가 옥천읍 옥각리 부근으로 옮겨간 것으로 알아요. 이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하면 지금도 한바탕 풍물을 즐기고 간다니까." (강천호씨)

풍장 치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 사람이야
 
 '막지리 출향인 만남의 날'을 기록해 놓은 이수길씨의 오랜 수첩. 이 수첩에는 막지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월간 옥이네
 
"고향의 역사를 지킨다는 건, 어찌 보면 누군가의 뿌리를 지키는 거나 마찬가지지. 훗날 출향인들이 찾아와 고향을 물을 때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얼마나 외롭겠나." (이수길씨)

이수길씨는 수몰 전후 마을 구석구석을 조사해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가 보물처럼 간직해온 수첩에는 역대 막지리 이장 연혁과 막지리 가로등 현황, 그 위치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그중 가장 중요시하는 기록은 바로 '막지리 출향인 만남의 날'과 관련한 내용이다. 막지리 출향인 만남의 날은 매년 봄 막지리에서 출향인과 마을 주민이 한데 만나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아 24년간 이어졌다.

"1994년 6월 5일 발기인 대회를 하고, 총 24회까지 이어지다 2017년 4월 9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지. 100여 명이 참석했고. 그 사람들이 모여 눈물로 얼싸안고,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노래자랑을 하고. 그러다 보면 마음에 얹힌 그리움이 그날만큼은 쑥 내려가고는 했어." (이수길씨)

온 마을 사람이 막지리에 다시 모였음을 알리고, 각자의 회한을 쓰다듬는 기막힌 풍물 소리가 이 행사의 백미였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동서남북 흩어져 있었어도 상쇠가 꽹과리를 들면 순식간에 모여들어 악기를 잡았지. 어려서부터 들어 뼈에 새겨진 장단을 잊을 리가 있나. 다만 몇 사람이라도 모여있으면 풍물을 잡던 그 옛날이 그리워서 모여든 사람이 아닌가." (이수길씨)

"그러니 아직도 마을 회관 창고에 풍물이 다 남아있지요. 그때 잘 쳤던 사람은 세상을 떠났어도 60대 몇 사람이라도 막지리에 오면 여즉 풍물을 치는걸. 아직 그 위에 먼지도 안 앉았을 거요. 대청호가 생기고 우리 마을에 많은 게 사라졌지만 그래도 풍물만은 남았지요. 풍물이 만든 우애와 함께. "(강천호씨)

이수길씨가 스마트폰을 꺼내 한 편의 영상을 재생시킨다. 그의 동생 이봉주씨가 과거 막지리 풍물 치던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다. 이봉주씨는 마을 이장이었던 이수길씨와 함께 수몰 이전 막지리 전경을 사진으로 남겼고, 마을을 떠난 후에도 출향인의 날이면 막지리를 찾아 막지리 풍경과 풍물을 음성과 영상 등으로 남기는 데 힘썼다.

그는 성심껏 기록한 막지리 관련 자료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이봉주'를 통해 공개하고 있는데, 2001년 만남의 날 행사에서 풍물을 치는 모습과 2002년 막지리 풍물 소리('2002년 막지리 풍물놀이' 검색) 등을 지금까지도 선명히 감상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송두리째 잃고 막지리를 떠나간 출향인을 애틋이 여기는 마음은 손호연 이장 역시 특별하다. 

"나 역시 출향민으로 서울에서 지내다가 2015년 막지리로 돌아왔기에 그리운 마음을 잘 알지. 만남의 날에 울려 퍼지는 풍물 소리가 유독 마음을 울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 풍물에 관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아마." (손호연 이장)

2018년, 손호연 이장은 만남의 날과 성묘를 위해 막지리를 찾아온 2세대 출향인들이 편히 쉬고 갈 수 있도록 출향인의 집 '맥기 쉼터'를 마을 중앙에 마련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막지리 출신 천기석 시인의 시 '막지리 연가'와 이봉주씨가 남긴 막지리 옛 사진을 걸어두었다. 그렇게 이 쉼터는 주민들의 사무치는 옛 모습을 담아 수몰 이전의 막지리를 재현한다.

"2017년까지 만남의 날을 했는데, 쉼터가 생긴 2018년부터 만남의 날이 멈췄어. 서운한 일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 막지리를 고향으로 여겼던 어른들은 일찍이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는 올 수 없는 사정이 있을 테니. 지금은 우리 마을 사정도 비슷해. 동네에 음식 만들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은걸."

손호연 이장은 막지리 곳곳에 걸린 축하 현수막을 가리키며 올해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한다. 길이 가파른 데다 뱃길이 주요 교통수단이던 역사가 있어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던 막지리. 마을 턱 끝까지 대청호 물이 넘실대지만, 주민들이 이용할 물은 없던 이 마을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상수도 공급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내년 봄까지 집집마다 배관을 설치해주겠다고 하더라고. 눈앞에 차오른 물을 보며 마실 물 길러 다니는 우리 마을 사람 마음이 어땠겠나. 그저 물에 관해서라면 애환이 가득할 뿐이었지. 손호연 이장이 힘을 많이 썼어." (이수길씨)

"이런 일도 있어 기쁠 따름이야. 올해 안에 준공식을 한다고 하는데, 그때 다시 사람들 불러 모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출향인들이 마을을 찾은 건 2020년 코로나19가 심할 때였거든. 민감한 시기인지라 몇몇에게만 소식을 알렸는데, 그래도 한 20명은 참석했을 거요. 그날도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풍물을 쳤어. 이런 마을에 가끔 풍물 소리라도 울리고 가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고맙지." (손호연 이장)

"풍물이 잘되는 마을은 단합이 잘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풍물이 잘 되려면 독불장군이 있어서는 안 되거든요. 풍물은 단합 그 자체인 거지요. 풍장칠 때 만큼은 모두가 한 사람과도 마찬가지여야 하니까. 그렇게 한 사람처럼 숨 쉬며 쌓아온 정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지요." (강천호씨)
 
 충북 옥천군 막지리 마을회관 창고에 보관된 풍물들. 옛것과 새것이 섞여 있다. 어느 집에서 기증했는지 알 수 있도록 적어놓은 '평산신씨' 네 글자가 흥미롭다.
ⓒ 월간 옥이네
      
월간옥이네 통권 70호(2023년 4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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