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토속 섬유 '소창'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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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기자]
얼마 전 일제강점기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 설립한 '조양방직'이 세월에 견디지 못하고 버려져 있다가 대형 카페로 재탄생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러 조양방직에 갔었습니다. 그 계기로 강화도의 섬유산업 전성기와 그 흥망성쇠를 간단히 글로 정리 중입니다.
하지만 소창 체험장을 가보지 않고 인터넷 자료만으로 정리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거 같아 지난 3월 말 소창 체험장을 찾았습니다. 카페 조양방직이 있는 곳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가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 강화 '소창체험관' 외경 조양방직이 있는 강화읍 신문리에서 조금만 더 서울쪽으로 골목길을 가다보면 동네 안에 작은 한옥집들이 보입니다. 한옥뿐만 아니라 공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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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자본으로 강회에 세워진 최조의 직물공장 '조양방직' 강화읍 신문리에 카페로 재탄생한 '조양방직'은 일제 강점기 강화도의 섬유산업 성장의 신호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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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방직이 있는 강화읍 신문리에서 조금만 더 서울쪽으로 골목길을 가다보면 동네 안에 작은 한옥집들이 보입니다. 한옥뿐만 아니라 공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보입니다.
▲ 소창체험장 전시실 내부 조양방직과 같은 신문리에 세워진 평화직물의 건물을 개보수하여 현 강화군수께서 공을 들여 소창 체험관을 열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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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체험관에는 현재 강화직물산업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전시관과 소창에 스탬프 찍기 등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직물산업의 역사를 보기 위해 공장 건물로 들어서니 안에는 수동직조기와 기계식 직조기가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1937년 조양방직 설립시 기계식 직조기가 들어왔지만 그 전에는 대부분 1920년대에 김동식이라는 분이 개조한 수동식 직조기로 소창을 짰다고 합니다.
▲ 수동직조기와 기계식 직조기 1937년 조양방직 설립시 기계식 직조기가 들어왔지만 그 전에는 대부분 1920년대에 김동식이라는 분이 개조한 수동식 직조기로 소창을 짰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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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 인조견, 광목, 옥양목이 도대체 뭘까요
전시장을 안내하는 가이드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서도 알 수 없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재는 대부분의 직물공장이 소창만 만들지만 아주 예전에는 인조견도 생산했다고 하네요. 인조견이란 우리가 흔히 레이온이라고 부르는 섬유입니다. 반짝이는 특징이 비단과 닮았다고 해 비단 견 자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인조 비단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인견은 주로 면 조각이나 펄프를 화공약품에 녹여 실로 뽑아내어 만든 재생섬유의 일종입니다. 조양방직도 초기에는 인조견 생산 생산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강회지역 직물공장들이 생산했던 섬유들 예전 직물공장에서 생산했다는 인조견 샘플들이 직물회사 이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생산을 하고 있는 강화의 현 직물회사의 제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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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목이니 옥양목이니 하는 것들은 처음에는 다 수입 원단이었습니다. 먼저 광목은 폭이 넓은 원단입니다. 조선의 직조기는 손과 팔로 천을 짜기 때문에 팔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 때문에 좁은 원단 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영국에서 들어온 광목은 기계로 짜기 때문에 월등히 원단의 폭이 훨씬 넓었던 겁니다.
그래서 광목이라는 말이 만들어졌고, 옥양목은 표백처리를 하여 조선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아주 하얀 색이어서, 옥과 같다하여 옥양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소창이라고 불리는 무명천의 종류 무명은 보통 승 수(升數)로서 품질이 가름된다고 합니다. 샛수라고도 하죠. 찾아보니 보통은 일곱 새 정도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어서 생활복에 많이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12승이나 15승 수는 섬세한 섬유에 속하고, 오늘날에는 12승 수가 최고로 꼽히지만 조선시대 ≪고사통(故事通)≫이라는 자료에 보면 21승 면포를 이미 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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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창(小倉)은? 그냥 예전에 우리가 부르는 무명천입니다. 바로 고려시대 사신으로 청을 다녀온 문익점 선생이 몰래 들여와 우리나라에도 재배되기 시작한 목화로 만든 실과 천입니다.
소창은 목화솜에서 뽑아낸 실을 이용해 만든 23수 면직물입니다. 예전 아기 키울 때 사용한 천 기저귀가 바로 소창으로 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출판한 <강화의 직물, 소창>이라는 책에 의하면 소창은 일본의 고쿠라 오리 즉 소창직(小倉織)에서 나온 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쿠라는 현재의 일본의 키타큐스 지역입니다. 바로 1600년대에 부젠고쿠라번에서 생산되던 면직물의 명칭이 '고쿠라우리'였습니다. 구한말에 이미 일본의 문물이 조선에 흘러 들어와 '승정원일기' 등에 '고구라(故舊羅)'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우리 신문들에서도 고구라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그런데 소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는 아니고 해방되고 나서 그동안 소창직을 고구라라고 부르다가 이 말을 한글 음원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소창은 일본말을 우리말로 옮긴 사례입니다.
▲ 강화직물공장의 직기들 모형 원단 생산의 다양한 단계에 쓰이는 직기들의 모형을 전히해 놓아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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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토속 면직물 '무명'
무명은 당연히 광목이나 옥양목과는 다른 면직물로 우리 토속의 면직물입니다. 무명이라는 단어는 또 어디서 태어난 것일까요?
▲ 우리 선조들이 배틀로 천을 짜던 모습 소찿체험장 한쪽에 배틀로 배짜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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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보통 승수(升數)로서 품질이 가름된다고 합니다. 샛수라고도 하죠. 찾아보니 보통은 일곱 새 정도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어서 생활복에 많이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12승이나 15승 수는 섬세한 섬유에 속하고, 오늘날에는 12승 수가 최고로 꼽히지만 조선시대 ≪고사통(故事通)≫이라는 자료에 보면 21승 면포를 이미 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소창을 기계식 직조기로 짜고 있는 모습 기계식 방직기에서 소창이 생산되는 작은 공장을 창 밖에서 구경했습니다. 직조기 두 대가 쉬지 않고 세로 실에 가로로 실을 꿰어 갑니다. 그러면서 천의 면적이 점점 넓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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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으면 안 될 거 같아, 소창에 스탬프 찍는 체험을 20분 정도 간단히 하고, 그 다음으로 기계식 방직기에서 소창이 생산되는 작은 공장을 창 밖에서 구경했습니다.
직조기 두 대가 쉬지 않고 세로 실에 가로로 실을 꿰어 갑니다. 그러면서 천의 면적이 점점 넓어집니다. 아주 익숙한 광경입니다. 어릴 적 대구 고향집 인근에 섬유공장들이 꽤 있었는데 가끔 본 기억이 납니다. 왜 그 공장에 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무래도 주변에 방직 공장에 다니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 소창에 스탬프찍기 소창체험장에서 생산된 소창에 관람객이 다양한 문양의 스탬프를 찍어 간단한 디자인을 해볼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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