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에 기거했던 왕손, 왕의 혈통보다 중요한 것

김종성 2023. 4. 2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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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꽃선비 열애사>

[김종성 기자]

SBS 사극 <꽃선비 열애사>에는 신분을 감추고 이화원이라는 하숙집에 기거하는 두 왕손이 나온다. 죽은 폐세자 이평의 '공개된 아들'인 폐세손 이설(려운 분), 이평의 '숨겨 놓은 아들'인 이겸(정건주 분)이 그들이다.

이평을 비롯한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이창(현우 분)은 연산군을 연상시키는 폭정을 저지르고 있다. 폭군 이창에 대한 거부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를 몰아내려는 반정의 기운도 무르익고 있다. 그래서 이설이나 이겸이 왕으로 추대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SBS 사극 <꽃선비 열애사> 한 장면.
ⓒ SBS
 
 SBS <꽃선비 열애사> 한 장면.
ⓒ SBS
 

폐세자의 아들임을 입증해야 세손

그런데 두 사람은 공통적인 난제를 안고 있다. 폐세자의 아들임을 입증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설은 세손이던 어린 시절에 삼촌의 쿠데타로 혼자 숨어살았기 때문에 궁궐 사람들이 성인이 된 그의 모습에서 어린 폐세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겸은 이설과 달리 궁궐 밖 여성에게서 태어났다. 이겸이란 아이가 있다는 것조차 왕실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노비로 성장하다가 고관대작 집에 입양됐다. 이겸이 자신의 왕손 지위를 입증하는 것은 이설의 경우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각각의 유품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식별할 수 있는 물건을 간직하며 살아왔다. 거기다가 폐세손 이설의 경우에는, 자기 얼굴을 알아보는 내관이 있다. 이런 장단점들을 가진 두 사람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혈통 문제에 휘말린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고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이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우왕의 혈통은 모계와 부계 양쪽에서 다 모호했다.

'우왕의 어머니는 신돈의 노비인 반야'라는 이야기가 거의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증명력을 떨어트리는 결정적 자료가 공민왕에게서 나왔다. 공민왕은 반야가 아닌 제3의 여성을 우왕의 어머니로 공식 인정했다.

공민왕이 피살된 날은 음력으로 공민왕 23년 9월 22일(양력 1374년 10월 27일)이다. <고려사> 신우 열전(우왕 열전)은 그해 음력 9월 사건을 설명하면서 "왕은 우(禑)가 죽은 궁인 한씨에게서 태어났다고 거짓으로 꾸며낸 뒤, 한씨의 3대와 그 외조부에게 (관작을) 추증했다"고 서술했다. 공민왕이 죽기 직전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민왕이 공식 인정한 우왕의 어머니는 훗날 순정왕후로 추증될 한씨였다. 우왕의 생모가 누구인가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가장 공신력 있는 인증이다. 이를 배척할 결정적 증거는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민왕의 인증은 우왕을 쫓아낸 세력과 <고려사>를 기록한 세력에 의해 거짓말로 처리됐다. 위 <고려사> 기록에서 "거짓으로 꾸며낸"에 해당하는 한자는 모칭(冒稱)이다. 조선 건국 뒤에 <고려사> 필진은 공민왕의 인증을 주저없이 모칭으로 규정했다.

우왕을 적대하는 세력은 '신돈의 노비가 우왕을 낳았다고 말하게 되면 신돈이 우왕의 친부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공민왕이 한씨를 생모로 내세웠을 것'이라고 과감하게 추정했다. 하지만 이 추정을 뒷받침할 결정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왕의 혈통에 관한 <고려사> 기록은 공민왕의 인증이 거짓처럼 보이도록 서술돼 있다. 공민왕이 우왕을 한씨 혈통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우왕이 반야 혈통이라는 이야기를 확실한 사실처럼 서술하다가 공민왕의 인증을 살짝 소개했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이 볼 때도 공민왕의 인증이 거짓이라는 느낌을 갖기 쉽다.

궁인 한씨가 우왕의 생모라는 공식 인증은 우왕의 재위기간 내에는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이성계·정도전·정몽주 등이 우왕의 혈통을 신돈과 연관시키는 과정에서 그 인증이 거짓으로 규정됐을 뿐이다.

죽기 직전의 공민왕이 한씨를 우왕의 생모로 인증한 조치가 거짓임을 증명할 자료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우왕이 반야의 아들일 가능성과 더불어 한씨의 아들일 가능성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가서 반야를 가까이했다고 할지라도, 우왕이 반야가 아닌 한씨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우왕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공민왕이 친부라는 이야기와 신돈이 친부라는 이야기에 더해, 신돈의 친구의 이웃의 아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위 <고려사> 열전에는 신돈의 친구인 능우 스님의 어머니가 반야 모자를 보호하던 중에 아기가 첫돌도 못돼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능우가 이웃인 대졸(隊卒)의 아이를 납치해 신돈의 아이로 가장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고 <고려사>는 말한다.

그런데 우왕이 왕위를 빼앗긴 것은 혈통 논란 때문이 아니었다. 만 9세 때인 1374년에 왕위에 오른 그는 14년 만인 1388년에 쫓겨났다. 이는 몽골(원나라)에서 명나라로 패권이 이동하는 혼란기에 군대를 잘 관리하지 못하고 군사반란을 막지 못한 데 기인했다.

우왕은 요동(만주)정벌을 추진했다. 이는 신흥 강국인 중국의 명나라를 적대시하는 노선의 표방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도읍은 양자강 쪽인 남경에 있었고, 요동에 대한 이 나라의 영향력은 약했다. 요동의 여진족 중에는 명나라보다 고려를 따르는 집단도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요동정벌의 성공 가능성이 아주 낮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동정벌 추진을 놓고 그의 과오를 논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왕은 군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자신의 최측근인 최영 장군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조민수마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에 참여했다.

또, 당시 우왕의 권력 구조는 민심을 정확히 반영하기 힘들었다. 최측근인 최영은 강직하고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여론을 움직이는 개혁적 선비 그룹인 신진사대부들과 거리가 있었다. 문인들을 멀리하는 그는 이 그룹과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이성계는 달랐다. 이성계는 정몽주·정도전 등을 측근으로 둔 데서도 나타나듯이 신진사대부들과 가까웠다.

우왕은 최영을 가까이 하고 이성계를 견제했다. 그래서 이 권력 구도에서는 최영이 부각되고 이성계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지만, 우왕의 선택은 민심을 움직이고 여론을 만드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우왕이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왕의 혈통만큼 중요했던 것

왕조국가에서는 왕의 혈통이 정통성을 좌우했지만, 실제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었다. 민심을 얻지 못한 군주는 천심을 얻지 못한 군주로 간주됐다. 하늘의 버림을 받은 군주로 간주된 것이다. 우왕의 인생이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된 데는 권력구조의 영향도 없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을 폐위하고 그 아들 창왕을 옹립한 뒤 우왕·창왕 부자를 신돈의 핏줄로 규정했다. 그런 다음,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옹립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 논리를 내세워 1389년에 창왕마저 폐하고 우왕·창왕 부자를 죽게 만들었다. 이성계가 이 과정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진사대부들이 그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힘든 일이었다.

결국에는 혈통 문제가 빌미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긴 했지만, 우왕이 비극으로 내몰린 것은 군대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 권력구조가 민심에 부응하기 힘들었던 것 등에 보다 크게 기인했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이 왕이 된 그는 이런 한계들로 인해 '처음부터 가짜였다'는 비난을 받으며 인생을 마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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