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 2023. 4.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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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목소리. 베일에 싸여 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을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만났다. 위하이펑은 중국에서 아나운서를 가장 많이 배출한다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으로 누구보다 또렷한 발음과 편안한 목소리를 가졌다. 시중에 나온 교재로 중국어를 접한 한국 사람에겐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으로 건너온 위하이펑은 벌써 한국 생활 23년 차인 '중국 사위'다. 중국어 강사 시절 우연히 시작한 녹음과 내레이션 일로 성우의 길에 들어선 위하이펑은 이제 국내 출판업계는 물론 중국어 녹음 분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됐다.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도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어 라디오 세계와 23년 넘게 양국을 지켜본 산증인으로서 한᛫중 관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위하이펑의 솔직한 견해를 들어봤다.

Q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A : 이름은 위하이펑이고, 중국 헤이룽장에서 태어났다. 2000년에 한국으로 와서 정착했다.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방송을 하고 있다. 중국어 내레이션이나 더빙 일을 하는 성우로도 활동 중이다.

Q : 어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나?
A : KBS 월드 라디오의 중국어 방송은 매일 약 1시간 정도 편성된다. 나는 그중 뉴스 보도 파트의 녹음을 담당한다. 중국어 프로그램은 시작 부분에 항상 한국의 주요 뉴스를 먼저 보도하는데, 약 10~15분 분량이다. KBS 월드 라디오는 한국어 포함 11개 언어로 해외에 직접 송출되는 방송이다.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청취할 수 있다. 해외에 있는 청취자에게 한국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됐고, 내가 이 일을 한 지는 10여 년 됐다.

Q : 녹음 업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
A : 중국어 방송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회 녹음이고, 매일 첫 송출 시간은 오후 8시 반(한국 시간)이다. 녹음 일정은 녹음실 이용 상황에 따라 매번 바뀌는데, 보통 빠르면 오후 4시쯤 당일 뉴스를 정리한 스크립트가 나온다. 작가들이 중국어로 된 스크립트를 주면, 나는 30분 정도 리딩 연습을 거쳐 곧장 녹음에 들어간다. 가끔 돌발 사건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땐 녹음도 좀 더 늦어진다.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이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

Q : KBS 월드 라디오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A : 사실상 스카우트됐다. 그 전부터 아리랑 국제방송이나 EBS 등 여러 곳에서 방송했던 경력이 있었다. 2010년 당시에도 이미 TBS 교통방송에서 외국어 라디오 1세대 진행자로서 '샹웨서우얼(相約首爾)'이란 중국어 생방송을 몇 년째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KBS 측의 제안을 받았고, 발음이나 목소리가 아나운서 톤이라 그런지 뉴스 보도를 맡게 됐다.

위하이펑(于海峰)은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현재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맡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Q : 중국어 방송과 성우 일을 하게 된 계기는?
A : 사실 원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원래 베이징(北京)에 있을 때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었고, 한국에 와서도 계속 강의를 했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상황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4년쯤 같은 학원 선생님이 쓴 교재의 중국어 녹음 작업을 우연히 하게 됐다. 그 이후로 출판사나 녹음 스튜디오에서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시중에 나온 중국어 회화나 HSK(한어수평고시) 교재의 대부분은 내가 녹음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나 같은 경우는 시장의 수요에 이끌려 이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됐다고 볼 수 있다.

Q :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됐나?
A : 결혼 당시 베이징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 중이던 한국인 아내가 졸업하면서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다. 결혼 초기에는 베이징에서 2년 정도 살았는데, 아내와 장래를 고민하다 결국 한국행을 결정했다. 내가 한국에 가서 산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딱히 반대하시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와서 발생했다. 2000년 당시에는 한국으로 결혼 이민을 온 중국 남자가 정말 흔치 않아서, 출입국사무소 사람들조차 어떤 비자를 발급해 줘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 시기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 사위 중 내가 정확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으나, 10명 이내인 건 분명한 듯하다. 혼인 신고도 6개월 넘게 걸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한국에 온 지 너무 오래돼서 내 고향은 중국이지만 한국도 내 나라인 것 같다. 솔직히 이젠 올림픽 같은 경기에서 한국과 중국 중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다 기분이 좋다.

Q : 다문화가정으로서 자녀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는지?
A : 하나 있는 아들의 경우는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한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는 게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우리 가족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진 않았다. 아마 나도 인생의 절반 특히 내 인생에서 가장 혈기 왕성했던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Q : 23년 전부터 한᛫중 관계를 지켜본 소감은?
A : 막 수교했을 당시 한국 사람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나라이지만 당시 중국에 대해 알려진 바도 많이 없었고, 심지어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 사람을 '빨갱이'로 배웠다고 하더라. 하지만 교류가 시작되자 두려움은 호기심 또는 기대감 같은 거로 바뀌었다. 중국은 어떤 곳이고 어떤 일을 해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1995~1997년쯤 중국 유학이 크게 유행했다. 내 아내도 이때 중국에 온 거의 0세대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느끼는 한᛫중 관계의 '밀월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다. 이때 한국을 나쁘게 말하는 중국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장품, 음식, 노래 등 한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여겼다. 체감상 수교 이래 한᛫중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사드(THAAD)'와 '코로나 19'인 것 같다.

Q : 최근 한᛫중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A : 두 나라 간에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있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좀 많은 것 같다. 인터넷에서 서로의 나라를 함부로 비난하는 이들은 상대국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일부 네티즌들은 편협한 시각으로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 한᛫중 관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위치에 있다. 사실 누가 한국 대통령이 되든지 한᛫중, 한᛫미 관계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건 거의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Q : 한᛫중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A : 나는 한᛫중 관계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또 크게 받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어 내레이션의 경우 한국 기업의 중국 비즈니스가 줄어들어 기업체 홍보 영상이나 광고 녹음 수요가 뚝 떨어졌다. 교육이나 출판 업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없다 보니 교재 녹음 일감도 크게 줄었다. 2012년부터 한 대학에서 대우교수로서 강의했던 중국어 수업도 지난해 9월부로 폐강했다. 옛날에는 한 반에 학생이 10명에서 많게는 20명이 넘었는데, 이젠 1~2명도 모집이 어렵다고 한다. 학교에서 방과 후 교사로 중국어를 가르쳤던 아내도 이제는 과목을 한자로 바꿔 아이들을 가르친다. 한᛫중 관계가 하루빨리 나아지길 바란다. 그래야만 시장도 풀릴 것 같다.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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