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전세의 배신?… 전세제도 근본 돌아볼 때

신재희 2023. 4. 2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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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적으로는 전세대출 규제 강화, 장기적으로는 정책 방향성 고민 필요


전세 사기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전세제도 자체의 정책 방향성에 대한 고민도 함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이번 사태는 금리 인상 시기에 집값이 하락하며 잠자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일 뿐,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이었다는 게 문제의식의 출발선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전세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보완에 나서되, 장기적으로는 전세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주택 임대차 제도다. 그래서 영어로도 따로 번역하지 않고 ‘Jeonse’라고 쓴다. 임대인은 큰 규모의 자금을 한번에 조달할 수 있고, 임차인은 낮은 비용으로 거주하면서 가격변동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는 상호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오랜 기간 국내 임대차 시장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믿었던’ 전세제도가 대규모 전세 사기라는 파국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많은 이들은 전세 사기가 예견됐던 사태라고 말한다. 전세자금 대출 규모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면서 임대차 시장이 이른바 ‘깡통전세’에 취약한 구조로 재편돼 왔다는 것이다. 29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전세자금대출 규모(잔액 기준)는 2012년 23조2000억원에서 2016년 52조원, 2019년 102조원, 2021년 180조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일각에서는 전세제도가 ‘저렴하고 안전한, 서민을 위한’ 임대계약 제도라는 믿음이 맞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전세는 자세히 보면 자산계층에게 유리한 임대 형태”라며 “‘금리 리스크’를 감안하면 전세가 월세보다 저렴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전세제도는 사금융 제도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실수요 세입자로부터 부유한 투자자에게 자금이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 공적 금융에 비해 정보 비대칭성이나 위험 관리 측면에서 임차인이 훨씬 취약할 수밖에 없다.

전세제도는 임차인으로 하여금 ‘강제 저축’을 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또 다른 믿음도 있다. 일종의 주거 계층 사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효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과거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전세의 경제적 효과와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평생 주기 모형을 이용해 시뮬레이션했더니 전세제도에 따른 강제 저축 효과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지금의 전세제도는 주거 안정성보다는 변동성을 키우는 제도로 변질된 지 오래다. 역대 정부는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전세자금 대출 규모를 확대해왔는데, 역설적으로 고위험 ‘갭투자’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로 금융시장의 위험도는 높아졌고, 결과적으로 전세·매매가격까지 상승하며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끼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전세 발(發) 주택시장 위기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그리고 최근까지 금리 인상 시기마다 역전세·깡통전세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전세대출·보증보험 규제를 강화하되, 장기적으로는 전세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됐다고 지적한다. 박춘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세 제도의 거시경제적 위험과 정책과제’ 보고서에서 전세 대출 보증 비율을 점진적으로 낮추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현재 최대 100%인 보증률을 낮추면 금융사는 전세대출 심사를 더 까다롭게 하고, 임차인도 더 신중한 거래를 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전세대출에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세제도의 정책적 방향성을 둘러싼 논의도 불붙을지 주목된다. 당장 전세제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선진국형 주거 시장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나왔다.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특임교수는 “전세 제도가 유지되는 한 세입자 보호, 전세 사기 대책,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 등 대책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편법도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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