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교과서 손으로 훑는다…시각장애 영어교사 13년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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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영어 선생님의 13년 노하우를 참관하다
김 교사는 전맹 시각장애인이다. 빛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다섯 살 때부터 눈을 떠도 밤과 낮이 잘 구분되지 않고 희끄무레한 세상-그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에 살고 있다. 장애인의 날인 지난 20일, 기자는 그의 수업을 참관했다. 요청을 받은 김 교사도 13년간 시각 장애 영어 선생님으로 일한 노하우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황제 납시오!”
오후 1시 20분 학교 3층 영어교과실 앞이 시끌벅적했다. 2학년 6반 학생들이 5교시 시작 전 교실에 올라오는 김 교사를 둘러쌌다.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오르는 김 교사를 부축하거나 뒤따르는 모습이 왕의 행렬처럼 보인다고 생각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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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일반 학교 시각장애 영어 교사
김 교사는 2010년 1급 시각장애인 최초로 일반 학교 교사를 뽑는 중등교사 임용시험 영어과에 합격했다. 특수교육으로 향했던 다른 장애 교원과 달리 일반 학교에 배정된다는 점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화제가 되는 성공 스토리다. 지난 21일엔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출신의 김진영씨가 선천적 시각장애인 최초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격려 전화가 뉴스가 됐다. 김 교사는 “생각보다 늦게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나왔다. 어려운 시험이지만, 공부할 여건만 마련된다면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한다”고 덤덤하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의 교사 초년 시절의 꿈은 “평범한 교사로 평가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3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평범함’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이 바뀐 듯했다. 김 교사는 “이젠 장애를 긍정하고 내 존재를 온전하게 교육에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그의 교사 생활을 문답으로 정리했다.
Q : 학생들이 적극적인 수업 태도가 인상적이다.
A : “수업과 소통이 과거보다 훨씬 편해졌다. 코로나19 이후 원격수업 등 다양한 전자 장비를 이용한 수업 방식이 보편화한 덕분이다. 과제를 종이에 적어내는 방식의 수행평가는 학생의 글자를 점자로 변환해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과거엔 수업을 짜며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Q :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나.
A : “학생 목소리와 이름을 매치시켜 외웠는데, 중학교 학생들이 변성기를 겪다 보니 목소리로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한 학생의 목소리가 꽤 보이시해서 ‘He is handsome(그는 잘 생겼다)’이라는 문장을 만들어 줬더니 ‘저 여자예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수업을 도와주시는 분께 정보를 미리 물어본다.”(웃음)
Q : 재밌는 에피소드만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A : “학생들이 수행평가 결과를 단체로 조작한 일이 있었다. 수업 발표 횟수를 스티커로 기록했는데, 이걸 아이들끼리 ‘품앗이’ 한 거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자백을 받아내느라 애먹었다. ‘장애를 악용하는 짓은 정말 나쁘다’며 설득하고 겁도 줬다. 이후 수행평가는 내가 수업 때 즉시 첨삭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입시 관련 수업 주지 말라는 학부모 민원도
A : “그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확실하다. 어떤 학교에선 내게 (입시와 큰 관련이 없는) 중 1 수업밖에 주질 않았다. 학부모 민원 때문에 그랬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수업 도와주시는 분도 초임 땐 아예 없었다. 지금은 장애인교원 업무보조라는 이름의 지원 인력이 1명씩 수업에 들어온다.”
Q : 동료 교사나 학생들의 변화를 느끼나.
A : “내가 부임하면 출퇴근길에 점자 블록이 설치됐다.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구청에 민원을 넣어서, 이번 학교에서는 부임하자마자 교장 선생님이 직접 교육청에 요청했다. 내가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한 쪽 귀가 안 들리는 장애인’이라고 고백하는 동료도 있었다. 하지만, 13년차가 되도록 담임을 맡지 못한 건 아쉽다. 담임을 하기에는 제도적 여건이 열악해 신청도 안 했다. 당장 학생들을 관리하는 전산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젠 ‘고참’ 입장이 된 김 교사는 장애 교원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1년부터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조’(장교조)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둘러싼 사회 여건을 변화시켜 나가는 목표가 추가됐다.
Q : 김진영씨의 변시 합격 소식을 들었나.
A : “축하할 일이다. 어린 나이에 실명해 변호사가 된 사례가 내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 공부할 때 정보 접근의 제약을 경험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안다. 어려운 시험이지만, 공부할 여건만 마련된다면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김씨를 한 번 만나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고충도 나눠보고 싶다.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소회를 밝힌 기사를 봤는데, 이 또한 반갑다. 장애인 관련 법을 위해 김씨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장애교사를 꾀병 환자로 몰아가기도
Q : 이런 성공 사례가 계속 나올까.
A : “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장애 교원은 때로는 업무에서 배제되고, 때로는 비장애인과 같은 능력치를 요구받으며 차별을 겪는다. 장애 때문에 보직이나 담임을 안 주는 게 대표적인 예다. 몇 해 전 한 지체장애 선생님이 장교조를 찾았다. 2년째 담임 보직을 달라고 해도 학교에서 장애를 이유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장교조가 협조 공문을 보내고서야 선생님이 담임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다. 반대로 일반 교사와 획일적인 기준을 요구해 놓고선 ‘이것도 못하냐’는 식의 모욕을 주는 경우도 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는 장애 교원에게 다른 교사들에게는 받지 않는 수업을 메울 계획서를 써내라고 한 학교가 있었다. 꾀병으로 몰아가며 장애 교원을 모자란 사람으로 만든 것이었다.”
A : “나 같은 시각장애인은 교재나 업무 메신저, 전산 시스템에 접근이 잘 안 되는 고충이 많다. 청각장애인의 경우는 통역 배치가 된 교육청이 사실상 한 군데도 없어서 불편이 크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업무가 제대로 안 되니 동료 교사와 트러블도 발생하고 적응이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장애 유형별로 세심한 지원이 필요하다. 계속 요구하고 변화시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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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장애 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 줘야
Q : 장애인이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는 시선도 있다.
A :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고 본다. 4학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갔다가 학생에게 쪽지를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이 열심히 노력해서 학교를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공부를 안 해서 시험도 망쳤지만, 그런 선생님의 노력을 본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걷는 것만으로도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애가 오히려 교사의 자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한동안 내가 완벽한 교사가 돼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돼야겠다 생각했는데,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교육의 시작이라는 걸 학생들이 가르쳐줬다.”
Q : 어떤 교사가 되고 싶나.
A : “장애를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나아가서 긍정하고 싶다. 장애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비극이지만, 그걸 교육하는 학교는 장애를 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 아닌가.”
최민지 기자 choi.minji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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