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낙선해도 송영길이 격려"…檢협조자 돌변한 이정근 누구
“나는 로비스트 기질이 있어.”
각종 알선·청탁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이 2020년 사업가 박모 씨에게 한 말이다. 이 전 부총장은 2019년 1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박씨로부터 정부지원금 배정 알선, 공공기관 임직원 승진 알선 등의 명목으로 32차례에 걸쳐 약 10억원 상당의 금품을 받았다. 법원은 지난 12일 1심에서 이 전 부총장에게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자신을 ‘로비스트’라고 표현했던 이 전 부총장은 박씨에게 정·관계 인맥을 과시하며 각종 이권과 인사 청탁의 해결사를 자처했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불모지인 서울 서초갑에 전략공천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투신한 이 전 부총장은 불과 3~4년 만에 민주당의 마당발을 자처하는 로비스트가 됐다.
이 전 부총장이 정치권에 입문한 뒤 6년 가까이 휴대전화에 저장한 약 2만7000개의 통화녹음 파일은 노웅래 의원의 뇌물수수 및 정치자금법 위반, CJ그룹 계열사인 한국복합물류 취업청탁 의혹 사건에 이어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 사건의 단초가 됐다.
방송작가→DJ 연설팀→인성교육 사업가로 변신
1962년생인 이 전 부총장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MBC PD수첩 취재리서처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 전 부총장은 KBS 환경스페셜, EBS 하나뿐인 지구, KBS라디오 FM매거진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했다. 이 전 부총장은 작가 시절 민주당 측 인사들과 연을 맺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연설팀에 합류하며 정치권에 발을 디디게 된다.
이 전 부총장은 2006년 ‘밈코리아’라는 방송영상물 제작업체를 만들면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방송작가 경험을 살려 방송프로그램, 홍보영상물 제작에 나섰고, 2008년부터는 이 전 부총장의 남편이자 인성교육 강사로 활동하던 박모 씨와 인성교육을 소재로 강연과 특강, 저술로 사업 확장했다. 이 전 부총장은 2012년 남편과 ‘인성공부’라는 책을 출간하는 등 학생·학부모와 기업 등을 대상으로 ‘현대인의 자기성찰과정’ ‘인성교육 명강사 양성과정’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15년 11월 출간된 ‘인성에서 길을 찾다’에 이 전 부총장과 공저자로 참여했던 A씨는 28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함께 인성교육 강의를 듣고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정치권 인맥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관심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출마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며 “아이디어가 좋아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데 주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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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민주당 인재영입…4차례 서초 공천
인성교육 사업에 매진하던 이 전 부총장은 2016년 3월 인재영입 케이스로 민주당에 입당, 험지로 꼽히는 서울 서초갑에 전략공천 됐다. 김성곤 당시 민주당 전략공천위원장은 이 전 부총장 공천을 발표하며 “여권의 쟁쟁한 후보와 견줘볼 때 ‘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밀리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이 전 부총장은 이후 2016~2022년까지 4차례 연속 민주당 공천을 받고 선거에 나섰지만 번번이 낙선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28.48%의 득표율을 기록, 새누리당 이혜훈 후보에 뒤졌다. 2018년 지방선거 때는 서초구청장 후보로 출마해 41.06% 득표율을 얻었지만, 현직 구청장이던 자유한국당 조은희 후보에게 패했다.
이 전 부총장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윤희숙 후보와 맞붙어 36.9% 득표율로 낙선했다. 2022년 3월 서울 서초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72.72% 득표율을 기록한 국민의힘 조은희 후보에 크게 밀렸다.
이 전 부총장의 선거를 도왔던 서초구의 한 인사는 이 전 부총장의 선거 방식에 대해 “유력 정치인과의 인연을 특히나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장의 선거사무실 외벽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 혹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유력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 전 부총장은 특히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와의 친분도 유독 강조했다고 한다.
한 전직 구의원은 “선거 기간이나 지역 행사 때 송 전 대표가 자주 찾아와 격려했다”며 “매번 선거에서 떨어지는데 공천을 받는 건 송 전 대표나 유력 정치인들과의 인연 덕분이겠거니 생각했다”고 말했다.
매번 낙선했지만 당내에서는 사무부총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이 전 부총장은 지난해 사업가 박씨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됐다. 이 전 부총장과 박씨 사이의 채무 관련 민·형사 갈등이 시작됐고, 박씨가 지난해 7월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이 전 부총장의 금품수수 의혹 사건이 본격화했다.
구속 후 변심…통화 녹음 담긴 USB 확보 협조
이 전 부총장은 지난해 9월 구속 전만 하더라도 “채무 관계에 따른 분쟁”이라며 정치적 대가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구속 후에는 태도를 바꿔 검찰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부총장 측은 구속 전후로 가까운 정치권 인사들에게 박씨와의 채무관계 해소를 위해 돈을 빌리거나 사건 관련 구명운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책임을 떠안게 되자, 구속 전 지인에게 맡겨둔 USB와 휴대전화 등의 위치를 검찰에 알리는 등 증거 확보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기소된 뒤 이 전 부총장은 변호인 동행 없이 검찰청을 오가며 검찰의 돈봉투 의혹 수사 진행에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총장은 최근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신과 강래구 전 한국수자원공사 상임감사위원의 통화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강 전 감사는 송 전 대표의 당 대표 당선을 위해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 돈봉투를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전 부총장 측은 “현재 휴대전화나 통화 관련 증거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이 전 부총장은 검찰의 구형보다 높은 1심 선고와 통화녹음 유출 등의 문제로 변호인 교체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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