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잃는 장애인들 우린 짐짝이 아니다

김승연 2023. 4. 29. 04: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짐칸 취급받는 고속열차·지하철 휠체어석
휠체어석, 좌석 아닌 짐칸 변질
짐에 둘러싸인 장애인들 “불쾌”


얼마 전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무궁화 열차의 휠체어석을 예약한 장애인 승객의 탑승을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코레일 측은 열차가 이미 ‘입석 손님’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장애인 승객을 태우지 않았다. 비단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휠체어 장애인들이 종종 열차에 마련된 휠체어석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휠체어 장애인들은 공통적으로 휠체어석을 ‘누군가의 좌석’이 아니라 그저 ‘짐칸’으로 여기는 현상을 문제로 지적했다.

KTX에 휠체어석을 알리는 픽토그램이 있는데도 캐리어가 버젓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 전윤선씨 제공


휠체어 장애인 전윤선(52)씨는 고속열차를 탈 때면 곧잘 마주하는 풍경이 있다. 휠체어석에 여행용 가방이나 골프가방 등이 놓여 있는 장면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 모양의 픽토그램이 무색하게 휠체어가 있어야 할 공간에는 캐리어가 놓여 있다. 객차 내 승객이 많아서 짐의 주인을 찾지 못하면 전씨는 어정쩡하게 짐 근처에 서 있게 된다. 휠체어석은 분명 사람 좌석인데 짐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꼭 ‘짐짝’이 된 기분마저 든다. 전씨는 28일 “휠체어석은 짐칸이 아니다. SRT나 KTX를 이용할 때마다 짐짝 취급을 받으니 너무 불쾌하다”고 토로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고속열차 특성상 휠체어석을 대부분 ‘캐리어’가 차지했다면, 지하철 휠체어석은 ‘자전거’ 몫이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이진영(39)씨는 주말에 지하철을 탈 때면 휠체어석에 주차된 자전거들을 곧잘 마주한다고 했다. 이씨가 휠체어석에 가도 자전거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통로를 가로막고 휠체어를 대야 한다.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는 도중 태연히 걸어와 자전거를 챙겨 내리는 사람들을 마주하다 분통이 터진 적도 여러 번이다.

휠체어 장애인 이진영씨가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에 탑승했다가 휠체어석에 여러 대의 자전거가 주차된 모습을 보고 직접 촬영했다. 이씨는 “지하철을 타면 10번 중 8~9번은 휠체어석에 짐이 놓여 있다”며 “그날은 화가 나서 SNS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고 전했다. 이진영씨 제공


여객운송약관 제37조에 따라 토요일과 법정 공휴일은 자전거를 휴대하고 지하철의 맨 앞과 맨 뒤칸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같이 야외 활동이 많은 주말, 자전거 휴대 승객이 늘면 휠체어석 공간은 쉽게 침범당한다.

심지어 자전거 동호회 인터넷 카페에서는 휠체어석을 자전거 거치대로 쓰는 방법을 ‘팁’인 양 소개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카페 이용자는 ‘지하철 이용팁’을 소개하는 글에서 “제일 좋은 위치는 휠체어 자리다. 처음엔 휠체어가 있으면 비켜줬지만 굳이 안 비켜도 휠체어석을 고집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또 다른 이용자는 “KTX 특실 제일 뒤칸에 휠체어석이 있기에 자전거를 두었다. 지하철 노약자석처럼 무조건 비워둬야 하나 싶었지만 승무원이 별말 없었다”고 후기를 작성했다.

휠체어석은 유사시 대비해 항상 비워두는 ‘소방차 전용구역’처럼 빈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비어 있으면 비장애인이 사용해도 된다는 의식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 권리 다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휠체어석은 수많은 장애인의 요구로 얻어낸 권리다. 장애인들에겐 신체 일부라 할 수 있는 휠체어가 안전하게 놓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전씨는 “소방차 구역과 임산부 좌석처럼 휠체어석도 일상적으로 비워둬야 당사자가 이용할 수 있다”며 “휠체어 장애인들은 시외버스를 탈 수 없어 기차가 사실상 유일한 장거리 교통수단인데 이마저도 짐이 차지한다면 이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휠체어 장애인들은 휠체어석을 ‘빈 곳’이나 ‘잉여공간’으로 여기는 인식이 휠체어석 이용을 막는다고 경고했다. ‘오면 치워야지’라는 생각을 염두에 뒀더라도 막상 휠체어석과 먼 곳에 앉아 휠체어 장애인이 열차에 진입하는 상황을 못 보는 일이 부지기수다. 또 휠체어 주변으로 짐을 치웠다 하더라도 또 다른 휠체어가 탑승하면 그 주변의 짐 때문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 이씨는 “지하철 휠체어석은 휠체어 두 대가 간신히 들어가는 정도의 좁은 공간”이라며 “그런 공간에 휠체어가 아닌 짐까지 놓여 있다면 휠체어 장애인에게 앉을 공간은 승객이 지나다니는 통로뿐인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열차 운영주체인 코레일의 대응체계 미비가 가장 큰 문제다. 휠체어석에 짐이 놓여 있을 경우 승객에게 휠체어석을 빈 상태로 유지하도록 안내하거나 경고하는 등 정해진 대응방식이 없다. 객실 승무원들에게 짐을 통제할 권한이 없다 보니 승객에게 배려를 호소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휠체어 승객 탑승 시 승무원이 짐을 치워 달라고 요청하는 건 당연한 처사”라면서도 정해진 매뉴얼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일각에선 휠체어석이 짐칸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려면 근본적으로 짐을 실을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KTX 등 고속열차는 장거리를 이동해 기본적으로 짐의 부피가 크고 장시간 공간을 차지한다. 지하철의 경우 단거리 이동에 승객이 짐을 갖고 내리면 공간이 나기도 하지만, 고속열차는 일정 구간 이동하는 내내 짐을 둘 공간이 필요하다. KTX 내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은 객실 내 상단 선반이나 통로에 있는 휴대물품보관소뿐이다. 명절이나 휴가철에 캐리어를 든 승객이 많으면 짐을 실을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럴 때마다 휠체어석은 짐칸이 된다.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이사는 “승객들이 목적에 따라 다양한 짐을 동반할 수 있는데 운영주체인 코레일은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등 20여개 장애인단체로 구성된 장애인제도개선솔루션(이하 솔루션)은 28일 코레일에 열차 내 휠체어석 짐칸화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건의했다. 건의 내용은 지난 19일 회의를 통해 열차 내 휠체어석에 짐을 둔 비장애인 승객과 장애인 승객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방지할 대책을 논의한 결과다. 장유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간사는 “일본의 신칸센에는 휠체어주차구역이 명확히 표시돼 있어 비장애인 승객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며 “이번에 코레일 측에 KTX 내 휠체어석 영역 표시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고 짐을 둘 때 대응할 승무원의 매뉴얼을 추가로 확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승연 기자 kit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