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몰라서 그렇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팔이 심하게 아팠다. 동네 통증의학과에 가서 왜 아프냐고 물었다가 “여러 원인이 있죠”라고 대답하는 의사의 속 편한 소리를 듣고 분개한 나는 결국 잘 아는 정형외과 원장을 괴롭혀 가까운 병원을 추천받았다. ‘강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정형외과’라는 추천에 빛나는 그 병원 원장은 진료실에서 나를 만나 간단히 초음파 검진을 해보더니 ‘테니스엘보’라는 정확한 병명을 말해줬다. 테니스는 쳐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병에 걸리느냐고 놀리던 아내는 평소 나의 노트북 사용 습관을 의심했다. 내가 노트북 받침대를 너무 높게 해 놓고 타이핑하느라 어깨와 팔에 무리가 갔다는 것이다.
아내의 말이라면 일단 긍정부터 하고 보는 나는 노트북 자판을 직접 치는 대신 다른 키보드를 연결해 사용해 보기로 했다. 유선은 너무 거추장스러우니 블루투스 키보드를 구해야 하는데 나는 기계나 도구는 통 아는 게 없어 드라마 ‘하얀 거탑’ 극본을 쓴 이기원 작가에게 SOS를 쳤다. 글쓰기에 관련된 온갖 ‘디바이스’에 능통한 이 작가가 얼마 전 키보드 성능 얘기를 댓글로 나누는 걸 누군가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질문 메시지를 보낸 지 몇 시간 만에 이 작가는 ‘비싸긴 한데 이게 우주 최강’이라며 휴대용 키보드를 하나 추천해줬다. 그러나 휴대용은 필요 없고 15만원짜리는 내게 너무 비싸니 좀 더 저렴한 것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이게 가성비 극강의 명기’라며 3만7000원짜리 무선 키보드를 하나 더 소개해줬다. 과연 베테랑 드라마 작가의 추천 품목답게 키보드는 설치도 편리하고 터치감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다 연결을 하고 나서 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자판에 익숙한 한글 자모는 안 보이고 영어 대문자만 깔끔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판 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이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불편했지만 뭐든 열심히 하지 않는 성격이라 타이핑을 따로 배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한글 자판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책상 위엔 영어 알파벳만 쓰여 있는 무선 키보드가 나를 비웃듯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결제 단계에서 한글 자판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난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자판을 두들겨 보니 나도 모르게 한글 문장이 매끄럽게 마구 써지는 게 아닌가. 개개의 자판에 한글이 어떻게 새겨져 있는지는 기억 못 하지만 어느새 나는 자판을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정식으로 배운 적만 없을 뿐 군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 키보드를 만지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판을 다시 쳐다보니 놀랍게도 G 글자에 ‘ㅎ’이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를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건 키보드 문제만이 아니라 글쓰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나에게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분들은 처음에 뭘 써야 할지 몰라 그야말로 쩔쩔맨다. 자기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연애했고 축복 속에 결혼해 아들딸 낳고 잘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연 따위는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내가 성격이 치밀하지 못하고 건망증이 심해 각종 실수담만으로 첫 책의 한 챕터를 다 채웠다는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하면 “사실은 저도 건망증이 심해요!”라면서 엇비슷한 실수담들을 쏟아냈다. 광고회사에서 만난 ‘매우 잘난 사람들’ 얘기를 한두 개 슬쩍 흘리면 ‘그 정도는 약과’라면서 특이한 성격의 직장 동료나 시댁의 팔촌 아저씨 얘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몸 어느 구석에 그런 얘기들이 숨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꺼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번 둑이 터지고 나면 몇 시간이고 흘러나온다. 그런데 얘기를 주고받으며 어깨를 치고 깔깔 웃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금세 ‘나는 특별히 쓸 얘기가 없는데…’ 자세로 돌아가 버린다. 이상한 회복탄력성이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같은 눈물 나게 웃기는 드라마를 쓴 박해영 작가는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그런 극본을 쓸 수 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되묻는다고 한다. “재밌었지? 니가 재밌다고 느끼는 건 그 요소가 니 안에도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니 안에 있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렇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재미있고 슬프고 놀라운 이야기는 이미 당신 안에 다 들어 있다. 다만 아직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걸 꺼내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글쓰기다. 그러니 글을 쓰자. 이건 내가 글쓰기 강사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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