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이 끝물일 무렵 청산도행 배를 탔다
[박태신 기자]
1. 설렘
▲ 청산도 유채꽃밭과 돌담. |
ⓒ 박태신 |
이청준 작가 작품 배경지를 찾아가는 단체 문학기행이었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주요 촬영지로 유명하다.
선배들로부터 이청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소설 쓰기란 "고단한 인생을 살게 해주는 씻김굿 역할"이었다고 한다. 김승옥 작가와 더불어 일본말을 배우지 않고 한글을 배워 소설을 쓴 첫 세대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한글을 써 나갔기에 나는 이청준 소설을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으니까.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교수직을 쭉 해나갔다가는 소설 쓰기를 게을리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는 일화는 대가다운 면모를 엿보게 한다.
내게 인상 깊었던 내용은 이청준 작가가 현실에 대한 투쟁보다는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을 탐색해 억압의 실체를 밝히고, 인간 구원의 문제까지 제시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은 뒤라 이 말이 이해가 되었다. <서편제>에서 한을 푸는 장면,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다도의 대가 초의 선사가 늘그막엔 다도는 물리치고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차를 마셨을 거라는 추측의 장면이 그렇다. 종교적 구원은 차치하고, 한을 풀고 용서를 하고 청함으로써 한 인간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이 구원 아니겠는가.
3. 유채꽃
배에서 내려 하루를 묵은 후 다음날 유채꽃밭에 갔다. 유채꽃 향을 맡아보았다. 부러 코를 대고 맡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은은한 향내였다. 강렬하지 않은 노랑이고 키와 꽃잎 크기도 크지 않을 뿐더러 은은한 향을 품고 있기에, 다들 유채꽃 무더기에 빠져 자신도 꽃이길 소망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겸허함 때문인지 봄의 유채꽃밭은 주변의 나무, 민가, 돌, 산, 바다와 잘 어울렸다. 섬의 벌판이라서 또한 그렇기도 하겠다. 달팽이의 느림을 자처한 섬이기에 이곳의 '느림우체통'은 제격에 맞았고, 사람들은 그 느림에 맞게 유채꽃밭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 서편제 버스 안에서 관람한 영화 <서편제>. |
ⓒ 박태신 |
기행 오기 전 영화 <서편제>의 원작을 읽었다. '열림원' 출판사의 <서편제>다. 이 책에는 소리를 찾아 떠나는 '남도사람 1'에서 '남도사람 5'까지 단편소설의 연작으로 구성돼 있다. 이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소설의 공통된 소재는 '소리'였다. 판소리 '서편제'는 대략 섬진강을 경계로 한 호남 서쪽, '동편제'는 호남 동쪽의 판소리로 구분한다. <서편제>는 그 서쪽의 판소리 가락이 들어 있는 소설이다.
영화 <서편제>는 '남도사람 1'('서편제')과 '남도사람 2'('소리의 빛')를 원본으로 삼아 각색한 것임을 책을 읽고 나서 알았다. 섬에 오기 전, 기행버스 안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았다. 요즘이 아니라 일찌감치 1993년에 영화가 제작된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파도 화랑포공원 자갈밭 해변에서 마주한 파도. |
ⓒ 박태신 |
청산도 서남 지역의 유채밭을 지나 화랑포 공원까지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오솔길이었다. 혼자 걸었다. 숲 사이로 바다를 보여주다 말다 하는 곡선의 오솔길이었다. 곡선 저 너머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는 오솔길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정말 뜻밖에도 자갈로 가득한 해변이 나타났다. 숲 오솔길을 걷다 해변가로 내려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보길도의 몽돌은 자잘한 크기인데 이곳은 알이 튼실한 자갈들로 가득했다.
자갈밭을 지나 바다 바로 앞까지 갔다. 이곳에서 이제껏 그 어느 때보다 파도를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파도가 하마 입처럼 크게 벌린 모습으로 내게 달려왔다. 그 우뚝 선 파도를 찍었다. 그러다 그 파도가 내 신발을 덮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이라 피할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경계심을 풀었던 것이다. 두 번이나 그랬다. 그때야 1분 동안에도 그 파도의 높이와 밀려드는 길이가 수시로 달라짐을 알았다.
▲ 파도와 파도 포말 화랑포공원 자갈 해변가에서 바라본 파도 포말. |
ⓒ 박태신 |
영화 <서편제>의 압권은 득음을 한 송화를 동생 동호가 찾아오고, 둘이 <심청가>를 북장단과 소리로 멋들어지게 그리고 눈물 나게 어울리는 장면이다. 나는 그걸 능동의 파도 포말로 표현해 보았다. 홀로 바다 앞에 앉아 바다의 판소리를 듣고 왔다 하겠다.
▲ 청산 에세이 정확히는 ‘청산 愛 say’ 낙서판이다. |
ⓒ 박태신 |
영화 <서편제>에서 아비 유봉이 오래전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든 딸 송화에게 물음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알고 있었지? (예). 그럼, 용서도 했냐? (……).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사무쳤을 틴디 니 소리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더구나. 이제부터는 니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우리 각자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크든 작든 한이 있을 것이다. 순탄하지 않겠지만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라고 이청준 작가는 송화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하는 듯하다.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일행들이 돌아가면서 소감 한 마디씩 발표했다. 출발할 땐 짧았지만 이땐 길었다. 소감마다 각별했다. 좋은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마음이 훈훈해져서 그랬을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 소감이 추억이 된 후의 느낌도 모임 '밴드'에 올렸다. 풍성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름의 '청산 에세이' 한 편씩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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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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