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125미터, 절망속에서 16일을 버티게 한 힘
[이준목 기자]
기적은 어쩌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과 같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있지만, 희망과 의지가 있다면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없다.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나를 꺼내줘-생존 좌표, 지하 125m'라는 부제로 1967년 구봉 광산 매몰사건을 조명했다.
1967년 8월 22일, 충남 청양에서 거주하던 36세의 김창선씨는 오남매를 둔 평범한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출근을 앞둔 창선씨는 간밤에 뒤숭숭한 꿈자리 때문에 잠을 설친데 이어, 오늘의 운세에서는 불길한 패가 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따라 웬지 아내가 싸준 도시락의 반찬도 마음에 들지않았다. 창선씨는 이래저래 찝찝한 마음을 안고 마지못해 출근길에 나섰다.
청양 지역은 당시 국내 최대의 금광으로 불리우는 구봉 광산이 위치해있는 광산촌이었다. 동네 집집마다 남자 한 두명은 광산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였고, 김창선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김창선씨의 당시 초등학생 딸이던 정옥씨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마을 입구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바로 정옥이의 아버지 창선씨가 일하던 광산이 무너졌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광산이 무너진 만큼 자칫 막대한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으로 갱도에 갇힌 사람은 단 한 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필 그가 바로 정옥씨의 아버지인 김창선씨였다.
그런데 광산 회사는 사고 직후, 창옥씨가 갱도에 갇혔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은 광산 산업이 붐을 이루던 시기였지만, 그만큼 위험한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구조작업을 할때마다 회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것을 감수해야했고, 애써 구조를 해도 시신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생사도 모르는 사람에게 드는 '구조비용'보다, 차라리 유족에게 지급하는 '사망보상금'이 더 돈이 적게 든다는 계산을 했던 것.
사고 3일째, 놀랍게 광산 회사는 사고가 나지 않은 다른 갱에서 채굴 작업을 재개할 것을 결정했다. 창옥씨의 구조는 마치 없었던 일인냥 모든 것이 다시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료인 광부들 역시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출근해야했다. 창선씨의 생사를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채굴을 재개하여 발파작업이라도 한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 4일째, 광산 사무실에 돌연 한 통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창선씨였다. 그는 살아있었고 갱도에 설치된 전화를 이용하여 "살려달라"며 구조를 요청했던 것.
사고 당일, 배수공으로 일하던 창선씨는 동료들이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혼자 남아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다가, 갱도가 갑자기 무너지며 매몰됐다. 다행히 공간이 있는 배수장 안에 있었던 창선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입구는 붕괴되어 도저히 혼자서는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창선씨가 갇힌 배수장은 무려 지하 125m 깊이에 위치해있었고, 이는 지상 50층짜리 건물과 맞먹는 깊이였다.
창선씨는 두렵고 당황스러운 상황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창선씨는 어둠속에서 주변을 탐색하다가 우연히 오래된 군용 전화기와 전선을 발견했다. 마침 창선씨는 해병대 통신병 출신으로 한국전쟁에서도 복무했던 참전용사였고, 평소 손재주가 좋아 기계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 창선씨는 이 전화기가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임을 직감했고, 군복무 경험을 살려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전선을 하나하나 복구하여 며칠 만에 마침내 전화기를 수리하는 데 성공했다.
연결된 전화를 통하여 창선씨는 "빨리 좀 꺼내주세요. 너무 추워요"라고 간절히 구조를 호소했다. 하지만 1967년 당시는 구조 장비가 열악했고 사고 4일째가 지났음에도 구조 작업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도 재난 구조의 골든 아워는 72시간인데, 창선씨는 이미 사고를 당한지 벌써 80시간을 넘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창선씨의 생존이 알려지면서 현장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사고 5일째, 구봉 광산으로 언론과 취재진들이 대거 운집하기 시작했다. '무너진 갱 속에서도 광부가 직접 생존 소식을 알렸다'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 스토리가 세상의 관심을 모은 것이다.
당시 경제개발붐이 한창이던 한국 사회에서 광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 갱도로 들어간 '산업전사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평범한 광부였던 창선씨는 어느새 불굴의 의지와, 절망 속 희망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신문와 뉴스, 라디오 기사에는 매일 속보로 창선씨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어느새 창선씨의 생환은 온 국민의 염원이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구조 작업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현장에 구조장비와 인력이 도착했고, 미국 공병대와 정비회사도 구조 작업에 가담했다. 구조대는 갱도 입구에 캡슐을 설치하여 지하로 내려보냈다. 다시 여기서 창선씨가 있는 배수장까지 지하 50m 두께의 갱도를 뚫어야는 지난한 작업이 이어졌다.
그나마 지지대에 걸려 무너지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며 한 달 가까이 예상되던 구조 시간을 일주일까지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거미줄처럼 엉킨 장애물과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로 인하여 작업은 좀처럼 진행되지 못하고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빈사 상태였던 창선씨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막힌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포자기해가던 창선씨에게 군용 전화기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에서 들려온 것은 바로 아내의 목소리였다. 창선씨의 아내는 "여기 사람들이 당신을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이 모여있어요. 곧 나올 수 있을 거에요"라고 남편을 격려했다. 눈이 번쩍 뜨인 창선씨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
당시 창선씨가 현장에서 전화 통화를 했던 녹취록들은 지금도 자료로 남아있다. 창선씨는 남겨진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없더라도 싸우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 효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오직 가족들만을 걱정했다.
한편으로 창선씨가 버틸 수 있었던 또다른 힘은 사고 당일, 아내가 싸준 도시락이었다. 짠 음식을 싫어했던 창선씨는 아내가 반찬으로 싸준 꼴뚜기 젓갈에 불평했지만, 묘하게도 염분이 충족되는 젓갈은 재난 상황에서의 탈수방지에는 최적의 식품이었다. 창선씨는 젓갈을 조금씩 나눠 섭취하고 배수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를 받아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또한 냉기와 어둠에 떨던 창선씨는 현장에서 찾아낸 전구와 전선을 연결시켜 자력으로 배수장에 빛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희망과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작업은 여전히 더디기만 했다. 어느덧 사고 8일째가 되어 추위와 배고픔이 한계에 도달한 창선씨는 죽음을 직감하고 소지하고 있는 잡지 페이지를 찢어 연필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바깥에서 지켜보던 창선씨 가족에게도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당시 창선씨의 아내는 인터뷰에서 "남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고 있다. 구조하시는 분들께 부탁드린다. 제발 목숨 하나만 건져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매몰 10일째, 구조대는 목표 15미터 지점중 9.5미터까지 내려간 상황. 수 천명의 광부들까지 구조작업에 동참했다. 심지어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위험한 구조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참여한 광부들도 있었다. 의료진과 기자들은 하루 두번씩 창선씨와 통화하면서 건강을 체크했다. 갱안에서 홀로 장기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있는 창선씨를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오직 삶에 대한 의지뿐이었다.
매몰 13일째, 구조대는 어느덧 창선씨와 2.5m거리까지 근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대한 바위가 다시 구조대와 창선씨 사이를 가로막았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도, 폭파 작업을 하는 것도 모두 창선씨가 위험해질 수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 여기서 구조대는 작업을 진행하던 중, 바위와 벽 사이에서 파이프가 연결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이프를 제거하면 그 틈으로 공간을 확보하며 사람을 진입시켜 구조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지만, 만일 잘못 뽑기라도 하면 갱 안에서 어떤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조대는 고심끝에 리스크를 감수하고 파이프 제거를 선택했다. 창선씨의 동료 광부인 조철호씨와 최수봉씨가 목숨을 걸고 위험천만한 마지막 구조 작업에 자원한다. 두 사람은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를 구하는 마음으로 들어가겠다"며 위험한 구조에 앞장섰다.
1967년 9월 6일, 매몰 16일째 캡슐을 타고 지하로 내려간 두 사람은 파이프를 뽑는데 성공했고 공간을 확보하자 조철호씨가 나서서 배수장 앞까지 도착했다. 안에서는 창선씨가 켜놓은 전구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정작 창선씨는 동료의 외침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철호씨는 입구를 막고있던 마지막 흙더미를 채우고 마침내 창선씨와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창선씨는 살아있었고, 자신을 간절하게 부르는 철호씨의 품에 안기며 반응했다. 무려 16일 만에 다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창선씨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캡슐을 타고 무사히 지상으로 귀환했다. 당시 뉴스에서는 긴급보도를 통해 '땅 속에서 가장 오래있던 사나이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족들은 창선씨의 돌아온 모습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창선씨는 매몰된지 15일 8시간 35분, 총 368시간 만에 구조되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기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고 이전 65kg이던 창선씨의 몸무게는 구조 당시 46kg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창선씨는 스스로 옷매무새를 추스를 만큼 의식이 또렷했다. 창선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고, 무사히 퇴원하는 날에는 밝은 미소까지 보였다. 국민들은 기적적으로 생환한 창선씨의 모습에 감동하며 그를 영웅으로 대우했다.
사고 이후 창선씨 가족들은 국민들의 후원금으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형편도 좋아졌다. 가족들은 창선씨가 구조된 9월 6일을 제2의 생일로 기념하기 시작했고, 창선씨도 좋아했다고.
김창선씨는 2022년에 작고했다. 생전에 창선씨는 당시 사건을 회상하며 "아이들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고백했다. "아이들이 아빠가 없으면 얼마나 불쌍하겠냐.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도 벌써 죽어버렸을 것"이라며 가족들의 존재로 절망속에서도 삶을 지탱하는 의미가 되었다고 밝혔다.
창선씨는 이후 1982년 태백 탄광사고가 발생했을때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손신광씨의 등 생존자들을 찾아 위로하기도 했다. 손신광씨 역시 14일을 버티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는데, 창선씨의 일화를 떠올리며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기적이 기적을 낳은 아름다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대중적으로도 자주 쓰이는 '막장'의 의미는, 본래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광산의 끝을 의미한다. 광부들에게도 막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간다는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 당시 수많은 과부들은 창선씨처럼 생계를 위하여 가족들을 부양해야한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그 위험한 막장을 묵묵히 드나들어야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우리 사회를 지탱한 소리없는 영웅들이었다.
창선씨가 생전에 남긴 어록은 지금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라면 되새겨볼 만하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해본적도 없었습니다."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고 난 창선씨는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아내가 그날 싸준 꼴뚜기 젓갈 반찬, 낡은 전화기와 전구, 포기하지 않았던 삶의 의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주려고 나선 친구까지, 사소해보이지만 작은 사건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창선씨에게 기적같은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다.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출근하고, 저녁이 되어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어쩌면 누군가에는 간절히 원했던 내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가 '하루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되새겨봐야할 교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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