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韓美정상 공동성명 첫 언급
납북자-억류자 가족들 "尹 대통령에 감사"
박선영 "다각적·실질적 노력으로 이어져야"
정전협정 70년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던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가 지난 26일(현지시간) 한미 정상의 공동성명에 처음으로 명시됐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10년째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씨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호소한 내용이 반영된 것인 만큼 향후 정책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28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한미 정상은 이번 정상회담 직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한미 양국은 북한 내 인권을 증진하고 납북자, 억류자,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언급한 것도, 한미 정상의 성명에 명시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는 한미 양국간 민감한 이슈였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6·25전쟁 휴전 과정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미국은 유사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까지 수립했다는 일화도 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8년 재임 중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양국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이후 한미 양국은 납북자나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이에 2013년부터 북한에 억류된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씨와 북한인권시민연합, 한보이스, 북한정의연대, 6·25 국군포로가족회, 물망초,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등 인권단체 6곳은 지난 20일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에게 각각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 70년 동안 최소 5만명 내지 8만명에 달하는 국군포로와 10만명 안팎의 민간인 납북자 송환을 일관되게 거부하고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베트남전, KAL기 납북사건, 해군 방송선 'I-2호정' 나포사건 등으로 최소 516명의 국군포로와 민간인 납북자를 억류하고 있지만, 북한 당국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최근 10년만 돌아봐도 북한에 붙잡혀 돌아오지 못한 우리 국민은 적어도 6명(김국기·최춘길·김정욱·김원호·고현철·신원미상 1명)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한미일 3국 정상은 프놈펜 성명을 통해 "납치자 문제의 즉각적 해결을 위한 공동의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일은 '납치자' 문제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데, 이것이 국군포로까지 확장돼 한미 간 공동성명에서 다뤄진 점은 문제 해결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윤 대통령이 취임식과 광복절, 서해수호의 날 등 여러 계기로 '보훈'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역대 정부가 '묻어둔' 국군포로 문제가 전환점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미국인 억류자 석방처럼 한국인도 돌아올 수 있도록 대북 교섭과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며 "특히 바이든 방한 시 방일 때처럼 피해자 가족과 면담을 갖도록 하는 한편, 유엔에서 2017년 이후 중단된 '안보리 북한인권 공개 토의' 재개와 '북한 책임규명 메커니즘 설치' 등을 위한 한미 공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납북자, 5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황인철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는 한미 정상이 내놓은 공동성명에 '납북자' 문제가 처음 언급됐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1967년생 황 대표는 고작 세 살 때인 1969년 KAL 납북사건으로 아버지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황원 MBC PD(당시 32세)로, 북에 납치된 채 여든을 넘긴 노인이 됐다.
황 대표는 "문재인 정부는 우리 가족과 여러 피해자를 남북 평화를 걸림돌처럼 여겼고, 지난 5년은 정말 가슴 아픈 시기였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 문제로 노력한 지 22년째인데, 영부인이 와서 위로해준 건 처음이었다"며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모습에 큰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앞서 김건희 여사는 지난 12일 황 대표 등 피해 가족들을 만나 문제 해결 의지를 직접 설명한 바 있다.
황 대표는 윤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의지에 큰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피해 가족들은 북으로 끌려 간 가족이 살아있는지 여부라도 알 수 있기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며 "아버지를 만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부가 북한에 단호히 책임을 묻고 실질적인 생사 확인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억류자, 10년째 북한에 붙잡혀 있는 동생
북한에 10년째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씨는 "형으로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에는 한계가 분명했고 지난 10년 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며 "간절히 기도하며 정상회담을 앞둔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잊지 않고 공동성명을 통해 호응해준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김씨의 동생 김정욱 선교사는 북중 접경 지역에서 탈북민을 도우며 선교 활동을 하다, 2013년 10월 북한에서 간첩 누명으로 체포됐다. 김 선교사는 2014년 2월 평양에서 기자회견 형식을 통해 '반국가 범죄 혐의로 북한에 억류됐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죄한다'고 전한 바 있다. 북한 당국은 국가전복음모죄로 김 선교사에게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정전 70주년을 맞이해 동생을 비롯한 억류자의 석방과 송환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며 "한미 정상의 언급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길 바란다.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한미동맹이 할 수 있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통해 할 수 있는 여러 측면에서의 노력으로 피해 가족들의 애달픈 소망이 이뤄지는 첫 단계이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국군포로, 역대 모든 정부가 외면한 '참전용사'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6·25전쟁 이래 국군포로 문제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언급한 것도, 한미 정상이 공동성명에 언급한 것도 처음"이라고 환영했다. 그는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날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노력이 시급하다"며 "평균 연령이 90대를 넘기신 국군포로 어르신을 부디 한 분이라도 모셔오는 결실로 이어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박 이사장은 문제 해결의 첫걸음으로 여러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역대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해온 탓에 사안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을 국민에게 실체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면서 "다가오는 현충일에 대통령이 국군포로를 모신다면 공직사회는 물론 국민에게도 상징적 의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 이사장은 미국의 '실종자 테이블(Missing man table)' 문화를 거듭 제안했다. 이는 미군 식당이나 추모 행사마다 실종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비워 두는 테이블을 뜻하는데, 윤 대통령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친수하는 오찬 자리에서도 '빈 테이블'의 숨겨진 의미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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