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동안 10편, 홍콩 '도박' 영화의 바이블
[양형석 기자]
운동을 하거나 경기를 볼 때 종종 내기를 한다. 하지만 가까운 지인들과의 친목을 위한 가벼운 내기를 넘어 실제 돈을 따기 위한 게 목적이 된다면 이는 '도박'이 된다. 도박은 베팅한 금액의 몇 배에서 많게는 몇 천 배 뛰어넘는 수익을 남기기도 해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도박에 쉽게 빠진다.
물론 복권과 경마, 경륜, 체육복표사업 등 합법적인(?) 도박들도 있지만 사실 도박은 중독성을 고려할 때 애초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대신 각 나라에서 제작한 도박영화들을 즐긴다면 도박의 '짜릿함'(?)을 간접 체험해볼 수는 있겠다.
▲ <도신>은 국내에서 <정전자>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
ⓒ 한국영화배급(주) |
동양배우 자존심 지켰던 왕조현
1980년대 후반 해외 여성스타들의 사진이 담긴 책받침을 모으는 게 중요한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책받침 스타'는 브룩 실즈와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였는데 쟁쟁한 서양스타들 사이에서 '동양'을 대표하던 스타가 바로 홍콩에서 활동하던 대만 출신 배우 왕조현이었다.
학창시절 농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왕조현은 10대 시절 대만에서 CF와 영화를 통해 데뷔한 후 홍콩 영화사와 계약하며 홍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홍콩활동 3년 만에 그녀의 대표작인 <천녀유혼>을 만났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천녀유혼>에서 청순한 처녀귀신 역을 맡아 고 장국영과 애틋한 멜로연기를 선보인 왕조현은 홍콩은 물론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여성스타로 급부상했다.
왕조현은 <천녀유혼> 이후 여러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며 이미지를 소비했는데 그 중 1989년에 개봉한 <도신>은 왕조현의 발랄한 매력을 볼 수 있는 영화로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왕조현 외에도 주윤발과 유덕화, 조민 등 홍콩의 스타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도신>은 국내에서 <정전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해 서울에서 1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조현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 다작을 하면서 <천녀유혼>과 <도신>으로 얻은 이미지를 빨리 소비한 왕조현은 크고 작은 가십에 오르내리다가 1994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왕조현은 1997년 3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진 않았고 2002년에 촬영해 2004년에 개봉한 <미려상해>를 끝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 <도신> 개봉 후 국내에서 영화 속 주윤발의 트레이드 마크인 올빽머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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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의 시리즈 제작은 쉽지 않다. 허영만 작가의 인기만화를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 <타짜>도 극찬을 받았던 1편 이후 점점 완성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재 3편까지만 제작됐다. 하지만 1989년에 첫 선을 보였던 <도신>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주인공이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7년 동안 10편까지 제작됐다(도신, 도성, 도협, 도협2, 도신2, 도성2, 도신3,도성풍운,도성풍운2,도성풍운3).
사실 <도신> 시리즈는 도신을 연기한 고진(주윤발 분) 한 사람만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다. 고진과 동고동락하다가 도신의 제자가 된 도자이(유덕화 분)가 '도협'이 되고 투시와 최면술, 염력 등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시골청년 아성(주성치 분)은 '도성'으로 거듭난다. 이렇게 여러 도박의 고수들이 하나의 세계관에서 어우러지면서 <도신>이라는 프랜차이즈를 꾸려 나갔다.
<도신>은 도박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정 감독의 또 다른 도박영화인 <지존무상>과 자주 비교된다(두 영화 모두 유덕화가 주연으로 출연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엄연히 색깔이 다르다. <지존무상>이 도박을 소재로 하고 있을 뿐 사나이의 우정과 의리 등을 강조한 누아르 장르에 가깝다면 <도신>은 적수가 없었던 '도박의 신' 고진이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리며 겪는 액션 드라마에 가까운 영화다.
<도신>과 <도성>에 이어 같은 세계관을 잇는 세 번째 영화는 1990년에 개봉한 <도협>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도협>은 <지존무상>의 후광을 누리기 위해 <지존무상3>라는 전혀 상관없는 제목으로 개봉했다(국내에서 <지존무상>의 속편으로 알려진 <지존계상>은 <지존무상>의 속편이 아닌 아류작에 가깝다). 결국 <정전자>와 <도성>, <지존무상3>, <도협2>로 국내 개봉명이 꼬이면서 관객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신>과 <도협>,<도성>,<도성풍운> 등은 모두 1989년에 개봉한 <도신>으로 시작되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1991년에 개봉한 주성치 주연의 코믹 액션영화 <신정무문>은 영화 초반 '도성'이 카메오(?)로 출연하지만 영화의 소재와 전개는 도박과 무관하다. 역시 같은 해 개봉한 매염방 주연의 <도패>에도 도성 역의 주성치가 카메오로 출연했지만 <도신>의 정식 후속작으로 인정 받진 못했다.
▲ 유덕화(오른쪽)은 1989년에 개봉한 홍콩 도박영화의 대표작 <지존무상>과 <도신>에 모두 출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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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 감독이 공동 연출한 <지존무상>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유덕화는 같은 해 왕정 감독이 연출한 <도신>에서도 도자이 역에 캐스팅됐다. 도자이는 땀 흘려 일하기 보다는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노려 신세를 고치려는 한심한 생각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고진을 돌보면서 인간적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는 도신의 제자가 되면서 '도협'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미스 홍콩 출신의 장민은 <소자병법>을 시작으로 <도성>,<도협>,<신정무문>,<녹정기>,<무장원 소걸아>,<구품지마관> 등 90년대 초반 주성치와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그렇게 '주성치의 여인'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 장민이 <도신>에서는 주윤발이 연기한 고진의 애인 자넷 역을 맡았다. 자넷은 고진이 행방불명된 후 왕조현이 연기한 제인에 밀려 비중이 작아지는데 결국 영화 후반 고진을 배신하는 부하 아의(용방 분)에게 허무하게 살해 당한다.
역시 주성치와 함께 수 많은 작품을 함께 하며 관객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사했던 고 오맹달은 주성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영화에서 악역을 주로 맡았다. <영웅본색2>에서 용사(석천 분)를 협박하는 황국정 역을 맡았던 오맹달은 <도신>에서도 도자이에게 돈을 빌려준 악랄한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주성치 영화에서의 유쾌하고 인간적인 오맹달을 기대하고 <도신>을 본다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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