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에드워드 호퍼의 내면 풍경

2023. 4. 28.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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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언제나 자연을 매개로 삼는 일이며, 어떤 오브제와 대면했을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 나의 내면에서 이는 반응을 화폭 위에 포착하는 일이다.” 쉰일곱 살의 에드워드 호퍼는 한 갤러리 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대상을 본 후 마음에서 일어난 반응을 옮긴 그의 작품은 미국인의 일상적 상실감, 고독감을 리얼리즘적 특성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호퍼의 그림들은 풍경과 인물 위에 쏟아지는 빛과 그늘의 마술적 효과로 연극적일 정도로 강렬한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림이 연상시키는 다음 장면, 그림이 다 담지 못한 프레임의 바깥 풍경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림 속 거리와 건물들은 더러움이 표백된 듯 단순했고 인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는 법도, 접촉도 드물었다. 현실 재현처럼 보이는 풍경들은 호퍼의 마음에서 엮이고 재구성된 어떤 오브제였다. 그러니까 호퍼의 그림을 리얼리즘적이라고 한 해석은 어쩌면 엉뚱한 관점인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관찰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 재현하려는 것이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에드워드 호퍼 서울 전시회는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시간제 예약 관람인 전시회의 티켓은 개막하기 전에 모두 동났다고 했다. 나 역시 안간힘을 써서 개막날 전시회를 볼 수 있었다. 다녀와서 그의 자료를 모두 뒤적였다. 전시장에서 상영한 호퍼의 여든두 살 때 인터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든 호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평가들이 내 그림을 두고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감 등을 표현했다고 말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건 그 사람의 시각이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마흔까지 무명의 화가였던 호퍼는 일러스트를 그려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마흔 넘어 화가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 그에게는 많은 양의 스케치가 남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작을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스케치를 보는 것도 놀랍도록 재밌는 일이었다. 호퍼는 어떤 풍경을 대하고 바로 그 느낌을 옮기는 화가가 아니었다. 완벽하리만큼 스케치를 꼼꼼히 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뒤 작업했다. 스케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편지와 인터뷰에서 고백한 ‘마음의 반응’, 바로 그것이었다.

호퍼는 도시의 건물, 자연 풍경을 많이 그렸지만 평생 여성 누드도 그렸다. 오직 한 사람, 아내인 조세핀 호퍼를 모델로 그렸다는 정설이 있다. 호퍼가 칠십 대에 조세핀을 모델로 그린 누드화 ‘햇빛 속의 여자’에서 보이는 몸 역시 마음의 풍경이다. 당시 모델이었던 조세핀의 나이 역시 칠십 대였는데, 그림 속 여성의 몸은 근육질인 데다가 노화의 징후가 그다지 없는 것이었다.

자료를 섭렵하고 난 후 ‘에드워드 호퍼-길 위에서’라는 전시회 제목을 되새겼다. 1908년 이래 거의 50년이 넘도록 호퍼는 맨해튼 한 건물의 3층 꼭대기 층에서 별 변화 없이 매우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미국적인 장면을 그린 미국적인 화가’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삶과 유관하다.

전시장 2층 파리와 3층 뉴욕,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의 풍경들을 관람하고 나면 1층의 조세핀과 호퍼의 자료들을 볼 수 있는 동선으로 짜여진 전시회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일까. 호퍼는 ‘길 위에서’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을 마음에 저장했다. 예술가의 마음에 저장된 삶의 풍경은 하나의 그림으로 남았다. 낯선 파리나 뉴잉글랜드의 여행지에서 목격한 건물들과 사람들도 마음에 남았지만, 일상적인 미국의 카페와 사무실과 가게의 풍경도 길 위의 풍경으로 남았다.

호퍼의 마음에 남은 장면은 영원히 살았다. 실제 풍경도 변하고 사람 마음도 변하지만, 창작의 불쏘시개가 된 그 순간의 마음이 예술 작품이 되면 생명력이 생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고 마음에 저장했는가. 이 마음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호퍼의 그림들은 마음의 문제를 환기하면서, 사람들에게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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