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저격정치만 하는 최고위원들
정당에서 최고위원의 서열은 넘버 쓰리다. 당대표와 원내대표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자당 출신의 국회부의장이나 서울시장, 경기지사보다 서열이 높다. 최고라는 말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당의 어른 또는 리더의 위상을 갖는다. 한마디로 당내에서 최고로 중한 사람들이란 의미다. 그런 최고위원들이 요즘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장기(將棋)로 치면 차(車)나 포(包) 못잖은 위상일 수 있는데 그렇기는커녕 마(馬), 상(象)도 못 되고 앞다퉈 졸(卒)로 곤두박질치려는 것 같아서다.
졸로 치닫는 경쟁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여야 최고위원들은 1주일에 세 번 열리는 아침 회의가 시작되기 무섭게 상대편을 헐뜯거나 조롱하는 일에 매진한다. 방송에 출연하거나 SNS에 글을 쓸 때도 그렇고, 당 안팎의 행사장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한두 사람 정도만 그렇게 하면 될 법도 한데 줄줄이 다 그렇다. 비판도 이따금 해야 먹히는 법인데 회의 때마다, 예외 없이 거의 대부분의 최고위원이 상대 당을 비난하는 목소리만 낸다. 그러니 그 말이 상대한테 진정성 있게 들릴 리 없다. 저 당은 으레 그렇거니 치부할 뿐이다. 최고위원이 아니라 ‘저격위원’, 최고위원회의가 아니라 ‘사이다발언 경연장’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비난하는 내용도 사리에 맞지 않고, 품격과도 거리가 멀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해 화동 볼에 입을 맞춘 걸 두고 ‘성적 학대’ 운운하는가 하면, 상대 정당을 ‘쓰레기(Junk) 돈(Money) 성(Sex) 당’이라고 인정사정없이 돌팔매질한다. ‘김건희 여사 이지메’로 느껴질 정도로 특정인에 대한 비난에만 골몰하거나, ‘4·3사건은 (대통령이 참석하기에) 격이 낮다’ ‘김구는 김일성 전략에 당한 것’ 등의 엉뚱한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 양곡관리법 대안으로 ‘밥 한 공기 비우기’ 같은 황당한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제3지대 신당은, 신당이 아니라 쉰당 같다. 먹으면 배탈 난다’ 등의 말장난 같은 말들을 늘어놓기 일쑤다. 기성 정치인들과 달리 청년최고위원의 발언은 좀 신선해지나 기대했더니 품격 없기는 기성 정치인 뺨친다. 더불어민주당 막내 최고위원의 ‘화동 입맞춤’ 발언에 맞대응한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의 대꾸가 ‘머리에 포르노 생각밖에 없느냐. 욕구불만이냐’다.
우리 정치사에서 최고위원 위상이 요즘처럼 가벼운 자리가 된 적이 있나 싶다. 오죽하면 일부 최고위원에 대해선 자당 당원들마저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나섰을까. 최고위원회의를 왜 1주일에 세 번씩 하느냐, 한 번만 하라는 불만까지 터져나오는 실정이다.
우리 정치를 설전의 정치, 가십의 정치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당 지도부, 특히 발언권을 쥐고 있는 최고위원들부터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상대편을 향해 비판할 게 있으면 준엄하게 지적해야겠지만 그 방식이 극성 지지층을 염두에 둔 조롱이거나 혐오의 표출이어서는 곤란하다. 비판을 하더라도 금도를 지켜야 한다.
최고위원들이 지금까지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마이크를 쥐었을 때 상대편을 비판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은 부대변인 정도가 하면 될 역할을 최고위원들이 죄다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집권당과 제1야당의 최고위원이면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협치나 통합의 정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라는 메시지도 내야 한다. 현안에 대해선 비판만 하고 말 게 아니라 대안을 내놔야 한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에는 당대표나 원내대표 차원에서 여야 간 협상이 교착됐을 땐 여야 최고위원들이 ‘냉면 회동’ ‘맥주 회동’ ‘해장국 회동’ 등을 통해 거중조정의 역할을 자주 했었다. 또 여당이나 정권이 잘하는 것, 야당의 괜찮은 정책 같은 건 좋다면서 덕담과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당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원내지도부 멤버가 아니라 국민과 당원의 지지로 선출된 최고위원이기에 그런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최고위원쯤 되면 골수 지지층만 보지 말고 국민 전체를 보고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최고위원들이 자신들 하기에 따라 대한민국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큰 정치’를 펼치기 바란다. 명색이 최고위원이라는 정치인들이 만능칼인 맥가이버칼을 쥐고 아침마다 연필만 깎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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