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박세당 부자 “진흙칠한 마음으로 아첨하며 살 건가”
대쪽 부자, 대를 이은 품격
장원 급제한 아들이 능력을 인정받아 시관(試官)으로 차출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제(試題)에 논쟁의 불씨를 담은 것이 화근이었다. 한양에서 천릿길 평안도 선천 귀양길에 오른 아들을 보며 비감에 젖은 아버지 박세당,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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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 무시한 임금 비판한 박세당
아들에 “작은 이익 버려라” 편지
부패한 정승 실명 공격한 큰아들
유배지에서 얻은 화병으로 숨져
둘째도 왕과 맞서다 뼈 으스러져
아버지 “생사 갈림길선 차분해야”
」
관직 8년 만에 수락산 자락에 은거
박세당은 17세기 조선의 지식 지형에서 뚜렷한 궤적을 남기는데, 학술과 정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부친 박정(1596~1632)의 이른 죽음과 잇달아 몰아닥친 병자호란으로 그의 유년기는 춥고 배고픈 전쟁고아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윗대부터 내려오던 반남 박씨 가법에 따라 중형의 가르침으로 문자의 세계에 입문하는데, 열 살이 넘은 나이였다. 17살에 두 살 연상의 의령 남씨와 혼인하여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두 아들을 얻었다. 아내의 동생 남구만(1629~1711)은 처남이면서 뜻을 나눈 평생의 벗이었다. 그는 32세에 장원 급제로 관료계에 발을 들이는데, 처가살이 10년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그런데 정계에의 꿈을 키울 한창나이 마흔에 박세당은 수락산 자락의 석천동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곳은 아버지 박정이 공신이 되면서 하사받은 땅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했다. 관직 생활 8년 만에 파격적인 전환을 한 박세당, 이유가 있을 법하다. 벼슬을 내려놓기 1년 전 부교리 박세당의 발언을 보자.
“전하께서는 중신(重臣)을 종 부리듯이 하고 대각을 무지한 어린아이 다루듯 합니다. 듣기에 거북한 오만한 말을 경연의 신하에게 하시는데, 옛날의 무도(無道)한 임금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현종실록』 8년 9월 30일)
“시기 받느니 차라리 떠나겠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며 왕의 품격을 지적했지만, 그가 보기에 국정을 이끌어가는 대신들의 교조적인 정치의식이 더 문제였다. 그들은 실리(實利)로 접근해야 할 국제 관계에서 대명의리론에 입각한 반청(反淸)의 행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지만 도리어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떠나기로 한다.(『서계집』 22, 연보)
박세당의 석천행은 사회적 외로움에 더하여 가족생활의 회한도 한몫했다. 20년을 함께 한 아내 의령 남씨와의 사별과 광주 정씨와의 재혼이 2년 사이에 일어났다. 정씨와 재혼한 이듬해 이거(移居)를 단행한 것이다. 석천동으로 들어온 박세당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인생 후반을 만들어가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도모한다.
박세당은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사서(四書) 등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사변록(思辨錄)』을 내놓는다. 그에게 학문이란 명분과 형식에 사로잡혀 교조적으로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과 본질을 사색의 출발로 삼아 창조의 단계로 나가는 것이다.
책이 나오자 ‘감히’ 주자학설을 부정한 사문난적으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되었다. 성균 유생 홍계적 등 180명은 상소에서 “박세당은 주자의 학설과 어긋남이 있고 이경석의 비문에 송시열의 욕을 써 놓았다.”(숙종 29년 4월 17일)며 징계를 요청한다.
박세당의 제자 이탄(李坦)이 반격한다. “진리(의리)는 정해진 게 없어 의심이 생기기 쉽고, 학자는 그 의미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의심을 갖고 탐구하는 것을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한다면 강론하고 토론하는 공부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숙종 29년 4월 23일)
각 주장을 보면 이 사건은 『사변록』만의 문제라기보다 노론의 수장 송시열을 “함부로 거짓말하고 멋대로 속이는 사람”, 즉 탐욕의 상징 올빼미(梟)에 비유한 것이 사단이었다.(‘이경석 신도비명’)
명분 대신 실질, 올곧은 비판정신
모든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신에게도 충실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박세당은 “마음에 진흙칠을 하여 세상에 아첨하고 스스로 어진 체하는 향원(鄕愿)으로 살고 싶진 않다”(‘답윤증서’)고 하는데, 원하던 바의 자기 삶을 산 것 같다. 그렇다면 아버지로서의 삶도 뜻한 바대로 이루어졌을까. 추상같은 비판정신의 소유자 박세당, 아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세당은 차남 태보(1654~1689)가 24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자 “나는 반평생 고배를 마셨는데, 네 형과 네가 늦지 않게 합격하니 위안거리가 된다. 하지만 남자의 사업은 이러한 작은 기쁨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살얼음판 같은 벼슬살이의 기억 때문인지 이제 막 직임을 받게 된 아들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룬다.
“방회(榜會·합격자들의 친목 모임)에는 자주 나타나지 말라, 숙배(肅拜·왕이나 왕족에게 절하는 의식)를 한다는데 들어가 무슨 말을 할 것이냐, 상소 초안을 바로 보내라, 초안이 거칠고 오활하니 놀림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 어젯밤 별일 없었느냐, 며칠 동안 소식이 없으니 걱정된다”는 등 아버지는 거의 매일 도성의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는다.
심지어 글쓰기까지 개입하는데, 상소로 실전을 치러야 할 관료에게 문장 능력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의하면 문체는 평이하고 물 흐르듯 순조로워야 하고, 글은 수미(首尾)를 상세하게 살펴서 결론으로 향하되 주제의 맥락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기자태보 寄子泰輔’)
아버지 면모 따라 배운 아들들
박세당은 직언(直言)의 대가를 몸소 겪었기에 ‘말을 아낄 것’과 ‘나서지 말 것’을 자나 깨나 주문하지만, 아버지를 몸으로 배운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간다. 장남 태유(1648~1686)는 정승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자질구레한 이익까지 긁어내어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다며 실명을 거론하여 비판하다가 ‘대로(大老)를 침범한 죄’로 유배형을 받는다. 태보는 장자(長者)를 불문하고 파직을 주도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부친의 풍모가 보인다’는 칭찬인지 욕인지를 듣게 된다.
가끔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박태보가 이천현감을 지원하는데, 소장을 본 아버지는 사설이 너무 잡다하다며 타박한다. 결국 외지 근무의 소원이 이루어지자 아버지가 더 흥분한다. “내가 예전에 어사로 지나가면서 산과 들과 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그 고을을 보고 관리로 부임할 꿈을 간직해왔는데, 네가 그곳 현감이 되다니! 언제 부임하느냐?”
관계란 통상 상호적이라고 하지만 부모·자식은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아들 태보가 유배를 가자 아버지는 수시로 뒷산에 올라 그리움을 달랜다. “여정을 따져보니 이미 선천에 도착했으리라/ 부디 마음 누그러뜨리고 잘 먹고 잘 자거라/ 너는 알고 있는지, 내가 여전히 건강하여 /시름겨울 땐 산꼭대기에 올라가 너를 바라보는 것을.”(‘기시태보 寄示泰輔’)
교조화된 주자학에 반기 들어
이처럼 오감이 온통 아들을 향한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 박태보는 서해 지역의 자연에 빠져 놀러 다니기 바쁘다. 선천 부사와 뜻이 맞아 산으로 바다로 유람을 다니는데, 7개월의 유배 기간이 그에게는 경치와 여유를 즐기며 시를 짓는 시간이었다.(김경숙 ‘유배, 일상의 단절과 소통’) 도덕 교과서가 왜 자식의 효행에 집중하는지, 부모의 자애는 교육의 대상이 아닌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를 애타게 했던 두 아들은 결국 불우한 죽음을 맞이한다. 장남 태유는 유배지에서 화병을 얻어 죽었다. 차남 태보는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소두(疏頭·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음)로 나섰다가 왕의 친국을 받게 되는데, 또박또박 대꾸하다가 왕의 화를 돋우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배형을 받지만 노량진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아들과 독대한 아버지는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아들아 이제는 끝이로구나. 사생의 갈림길엔 모름지기 차분해야 한다.”
17세기 학술이 주자학 일색으로 교조화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색과 실천에 근거한 독자적인 학문을 이루어낸 박세당, 일견 불우했지만 격조 높은 삶이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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