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흉포한 봄을 지나, 계속해서 걸어갑니다

2023. 4. 28.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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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2023년의 4월은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요. 아무래도 봄날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습니다. 사회적 재난 수준의 대규모 전세 사기와 피해자분들의 연이은 자살, 대중에게서 큰 사랑을 받던 이의 자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그루밍 성범죄와 자살 생중계, 10대 학생들의 잇단 자살, 또래 살해 시도 후 자살.

실은 이 사건들을 몇 줄로 적어 내려가는 데 수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살 연구를 하는 심리학자이기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려운 건 아닙니다. ‘자살’과 그 외 몇 단어들로 이렇게 나란히 줄 세워 둘 사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우주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더욱 모진 사실은, 혹독한 봄은 비단 올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극단 충동의 지속은 1~3시간
힘든 건 나뿐만 아니랍니다
일단 그 순간을 버텨 주세요

마음상담소

봄은 원래 쉽지 않은 계절입니다. 지난해에도 국내에서 자살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4월이었습니다. 봄은 여러 환경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계절입니다. 새로운 학기, 새로운 관계, 기대와 실망의 반복은 그 자체로 커다란 스트레스입니다. 봄이 되면 더욱 심해지는 계절성 알레르기와 비염, 아토피 같은 염증성 질환 역시 우울·자살과 관련이 있습니다. 염증이 심해질수록 우리의 면역체계는 혼란스러워지고 수면의 질은 나빠집니다. 이래서는 새로이 밀려드는 자극을 뇌가 평소처럼 그럭저럭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봄, 유난히 극성스러운 미세먼지와 대기오염 역시 우울증과 자살의 원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5만여 건의 자살 사례를 분석한 캐나다의 연구와 152만 건의 노년기 우울증을 분석한 미국의 연구는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이 각각 자살과 우울의 위험요소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는 아동청소년 데이터에서는 이미 십여 차례 검증된 부분이기도 하며, 대기오염이 아동의 기분과 충동을 조절하는 뇌 네트워크의 회백질을 감소시킨다는 보고 역시 반복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내가 그래서 유독 요새 우울이 심해졌구나’ 하시는 분도 있으실테지요. 혹은 ‘그렇게 따지면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이 글은 목적을 다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따지다 보니’ 지금 모두가 힘든 게 맞습니다. 최근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2022년 지역사회건강조사’에 따르면 성인 데이터 23만건 중 일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우울감을 2주 이상 경험한 비율이 4년 연속 증가해 지난해 6.8%에 달했습니다. 15명 중 한 명꼴입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삶의 한가운데 모두가 자기만의 살얼음 위를 걷고 있습니다.

모두들 이 봄을 그럭저럭 지나기 위해 세 가지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모두가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버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음의 문제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나의 힘듦이 나의 부족함이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어서 품어야 하는 기본값이구나. 너도 힘들겠지, 내가 힘들듯이. 이를 직면하면 측은한 나 자신에게 친절해지고 타인에게도 상냥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힘들 때는 한없이 약해지시길 바랍니다. 버티려고 마시고, 고립되려고도 마시고, 나의 힘든 감정을 인정해주세요. 당연히 우울할 수 있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하고 자기 노력의 부산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세요. 강해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생이 정말 힘들지만 버텨 보겠다, 곁에서 지켜달라’고 내뱉는 모습에, 다른 사람도 자신의 결점과 슬픔을 드러낼 용기를 가집니다.

하버드대 심리학 연구팀이 지난주 발표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마지막 당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자살 생각을 해본 분들을 한 달 여 관찰하니, 자살 충동이 치솟을 때 평균 지속시간이 1~3시간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들거든, 두세 시간을 넘길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주세요.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과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냅다 외부 탓을 해버리고는 몇 시간만 버텨주세요. 삼 년 고개, 삼 년 고개, 그렇게 넘어가듯이.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우리는 모르니까요. 그저 호기심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살지도 말고, 미래를 미리 살지도 말고요.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처럼 살려 하지 마시고, 그냥 결함과 약점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으로, 흉포한 봄의 한가운데를 처음 걷는 듯 다시 한번 같이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봄날, 세상을 떠나신 분들과 그 곁의 선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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