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불 안 나는 바나듐 배터리로 세계 ESS 시장 석권이 꿈”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46〉 스탠다드에너지 김부기 대표
어린 시절 꿈은 로봇 공학자였다. KAIST 기계공학과 3학년 때 전국로봇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마치고, 모교에서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연구 조교수에 임용됐다. 그러던 어느 날 꽃길을 내던졌다. 스승과 선배들이 걸어간 연구자의 길을 접고,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광야(廣野)에 나섰다. 스탠다드에너지 김부기(38) 대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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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IST 교수 길 접고 창업 도전
화재 잦은 리튬이온 단점 극복
WEF ‘100대 기술 선구자’ 선정
롯데에서 차세대 먹거리로 투자
」
호기롭게 창업에 나선 지 4년. 불 안 나는 ESS를 연구하면서 30억원을 까먹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낙담을 딛고 일어선 지 다시 4년, 세계 최초로 ‘바나듐이온배터리’(VIB) 개발에 성공했다. 시장에 내놓을 자신이 생겼다. 투자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2020년 12월 손정의의 소프트뱅크벤처스가 100억원을, 1년 뒤엔 롯데케미칼이 650억원을 투자했다. 롯데는 스탠다드에너지의 지분 14%를 확보해 2대 주주로 떠올랐다. 단순 투자가 아니었다. 바나듐이온배터리를 차세대 먹거리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사이 스탠다드에너지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테크놀로지 파이어니어 100개사’에 선정됐다. 김 대표의 바나듐이온배터리 ESS는 지금 규제 샌드박스에서 검증을 받고 있다. 수입차 판매장이 즐비한 서울 강남 도산대로변의 압구정 하이마트 주차장이 그곳이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지난해 5월부터 이곳에서 바나듐이온배터리 기반 전기차 초고속 충전소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지난 14일 충전소 마당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로봇 공학자에서 배터리 창업가로
Q : 연구자의 길을 걷다가 창업으로 돌아선 이유가 뭔가.
A : “공학 자체가 좋아서 선배들처럼 연구원이나 교수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지도교수께서 창업을 권유하셨다. 제자 중에 연구자가 아닌 새로운 분야로 나간 사람이 거의 없어 아쉽다는 말씀이셨다.”
Q : 지도교수께서 뭐가 아쉽다는 말씀이었을까.
A : “교수님은 여러 기업과 공동 연구를 많이 하셨다. 연구과제가 상용화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벽이 많은데, 대학 연구실에서는 하기 어렵다. 보통 대학 연구실이 기술성숙도(TRL·Technology Readiness Level) 9단계 중 4단계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은 8~9단계에 이른 기술을 원한다. TRL 5~7단계는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교수님은 제자 중 누군가가 스타트업 창업으로 이 단계를 메워주기를 원하셨다. 우리 스스로 그 벽을 넘어보자는 거였다.”
Q : 왜 바나듐 배터리를 생각했나.
A : “리튬이온배터리를 사용한 ESS는 특성상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물을 전해질로 쓰기 때문에 리튬이온과 달리 불이 날 위험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판단이 맞는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태양광 발전과 함께 리튬이온 배터리 ESS 보급이 빠르게 늘어나던 초기에 화재가 한두 건 발생하더니 이후 국내에서만 연간 수십 건의 화재가 이어졌다. 리튬이온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은 해외에서 사와야 하는 비싼 원자재지만, 바나듐은 국내에도 매장량이 많고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다.”
물을 전해질로 써 화재 걱정 없어
Q : 그런 장점이 있는데 그간 왜 상용화가 안 됐나.
A : “사실 바나듐으로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건 3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루기가 어려웠다. 배터리는 수명이 길고, 안전하고, 효율도 좋아야 한다. 하나를 만족하는 건 쉽지만,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하는 배터리를 만드는 건 어렵다. 초기에 개발된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는 지금도 발전소 등지에서 ESS로 쓰고 있긴 하다. 하지만 흐름전지엔 액체 전극을 흘릴 펌프와 펌프를 움직일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도 창업 후 4년간 흐름전지의 단점을 개선하는 연구개발을 하다 결국 접었다. 방향을 튼 게 펌프가 필요없는, 미세 유동기술을 이용한 바나듐이온배터리다. 흐름전지를 접은 지 4년만인 2021년 4월에 세계 최초로 바나듐이온배터리 개발에 성공했다. 관련 특허만 140개인데, 이 중 60건이 미국 특허다. 160년 배터리 산업 역사상 우리나라에서 원천 기술이 시작된 유일한 사례다. 기술개발에 성공하니 투자 유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롯데케미칼의 투자도 그렇게 성사됐다.”
Q : 그렇게 매력적이면 롯데케미칼이 투자가 아니라 인수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A : “큰 기업이 유망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바로 인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초기에 지분 투자를 하고 교류하다가 이후에 인수하는 경우가 많다. 롯데가 스탠다드에너지를 처음 알고 투자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앞으로 롯데케미칼과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같이 바나듐이온배터리 사업을 이끄는 전략적 파트너라는 건 확실하다. 롯데케미칼은 우리 배터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핵심 소재인 전극 소재를 생산하는 공급사이기도 하다.”
전기차 충전소, 전기 선박 등에 적용
Q : 바나듐이온배터리를 어디에 쓸 수 있나
A : “리튬이온배터리보다 크기 때문에 자동차나 모바일 기기에 쓰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하지만 발전소 에너지저장장치, 전기차 충전소, 전기 동력 저공해 선박 등 쓰일 곳이 많이 있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전기로 움직이는 친환경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Q : 아직 전기차 충전소는 한 곳뿐이다.
A : “바나듐이온배터리가 신기술이기 때문에 위험한지 아닌지, 효율은 어떤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5월 설치한 압구정 하이마트 전기차 충전소는 규제 샌드박스 대상이다. 지난 1년간 실증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최근 한국전기설비규정(KEC)에 바나듐이온배터리가 포함됐다는 희소식을 받았다. 이제 거의 다 온 느낌이다. 현재 전국에 전기차 충전소가 1만개가 넘는다. 전기차 보급이 늘어나면 충전소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화재로부터 안전하고 효율 높은 유일한 배터리로 전국 전기충전소를 바꾸는 게 꿈이다.”
Q : 외국의 ESS 시장은 어떤가.
A : “국내에서 연이은 화재 사고로 ESS 보급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해외에서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한국이 배터리 강국이라지만, 리튬이온배터리에 쏠린 반쪽짜리 강국이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애초 전기차나 작고 가벼운 전자제품 용도로 만들어졌다. 해외에서는 리튬이온이 아닌 신기술 기반의 다양한 ESS를 많이 도입하고 있다.”
국내 ESS 시장 부활이 당면 목표
Q : 글로벌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나.
A : “글로벌 시장 진출이 중요하지만 현재로선 국내 시장이 더 중요하다. 국내 ESS 시장은 해외에 비하면 완전히 죽었다. 이걸 살려내지 못하면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도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기술이 아주 매력적이긴 한데, 너희 나라에선 그걸 얼마나 쓰나’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첫째 목표는 침체한 국내 ESS 시장을 부활시키는 거다.”
Q : 스탠다드에너지의 장기 목표와 비전은.
A : “처음 창업할 때 배터리 소재로 시작했다. 지금은 배터리 회사를 거쳐서 ESS 시스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에너지 유통회사가 되는 거다. ESS를 기반으로 한 전력서비스 시장 진출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2030년엔 연간 1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다. 전기가 흐르는 모든 곳에 우리 ESS 제품을 연결함으로써 회사 이름처럼 ‘에너지의 표준’이 되는 게 우리 비전이다.”
충전과 방전을 계속하는 2차 전지의 역사는 1859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가스통 플랑테가 납축전지를 발명하면서 시작됐다. 이후로 1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간 상용화된 배터리는 납·니켈·리튬이온 세 가지에 불과하다. 스탠다드에너지 김 대표의 바나듐이온배터리는 배터리의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한때 떴다가 져버린 많은 신기술 중 하나로 기억될까. 바나듐이온배터리가 대한민국 배터리의 새로운 축을 담당하게 될지 관심거리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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