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조선백자의 주인공들, 그들은 왜 이름도 없이 사라졌나
“현대미술가 작품 같네.”
요즘 화제인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기획전에서 ‘철화·동화백자’ 섹션을 둘러볼 때 들려온 소리다. 실제로 ‘백자철화 어문병’(사진 1)에 그려진 발 달린(!) 물고기는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 같다. “고된 시기에도 예술적 끼와 유머가 있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17세기 철화·동화백자는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연이어 겪은 후 청화 안료를 구하기 힘들어졌을 때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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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조선백자는 힘든 시기의 지방 백자부터 풍요로운 시기의 왕실 백자까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견해다.
전시에선 백자의 다채로움이 빛난다. 전위미술을 연상시킬 만큼 창의적 작품도 많다. 조선백자의 전위성을 일찍이 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였는데, 이번에 달항아리 못지않게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청화철화백자도 한 점 나왔다(사진 2). 김환기의 1950년대 말~60년대 초 그림에 등장하는, 추상화된 산(山) 모습을 꽤 닮은 문양이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유교적 백자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백자를 만든 도공들의 이름을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 이 연구원에게 물어보니 그가 연구했던 조선 자기 중에 제작자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데 우리는 몇몇 조선 도공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삼평과 박평의, 그리고 요즘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도공 백파선(본명은 아니며 ‘백 살 할머니 신선’이라는 뜻의 존경이 담긴 호칭이다) 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빚은 이삼평과 백파선은 각각 ‘도자기의 시조’ ‘도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신사와 절에서 기려지고 있다. 특히 백파선이 없었다면 조선에 여성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도기(陶器)는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었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자기(瓷器), 더욱이 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중국은 백자를 아랍과 유럽에 명품으로 수출했다.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의존하던 조선은 백자를 서역에 수출해 국부를 쌓을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주자학 근본주의를 따르면서, 상공업의 발달을 경계했다. 조선 도공들은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지니고도 익명의 존재로 머물렀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후 광해군 때 일본에 파견된 이경직은 포로로 잡혀간 조선 도공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그중 상당수가 이미 일본이 자리를 잡았기에 귀환을 거부했다고 『부상록』에 썼다. 조선 도공들을 확보한 일본은 이들 덕분에 중국을 위협하는 자기 수출국으로 변모했고, 그 수출 대금으로 근대화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그 여파는 오스트리아 여행작가 헤세-바르텍(1854~1918)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 1894년 여름』에서 조선의 공예품 수준은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비교해도 조악한 것이 많다고 적었다. 또 조선인은 외국인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벌려는 의지도 없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비하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한때 이웃 나라 국민보다 훨씬 앞섰다고 적시했다. “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인쇄술 발명보다 100년이나 앞선다!”라고 썼다. 그는 조선 도자기 역사도 제법 알고 있었다. “조선의 도자기와 채색 백자는 이미 15세기에 유명했고,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구입했다. 일본이 조선을 끔찍하게 파괴한 전쟁이 끝났을 때, 사쓰마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자신의 고향인 규슈 섬으로 끌고 갔는데, 오늘날 사쓰마 도자기가 최고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도공들 덕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일침은 뼈아프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새로 습득한 기반 위에서 무언가를 더 만들어 마침내 많은 영역에서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유명해진 반면, 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관리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 탓에 그나마 존재하던 산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그는 조선인은 “훌륭한 본성” 때문에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백범 김구의 비판 들려오는 듯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유교와 결부된 조선백자를 볼 때 그 예술성에 감탄하면서도 그 그림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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