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안 나는 바나듐이온 배터리로 세계 ESS 시장 석권할 것”
[혁신창업의 길]46. 스탠다드에너지 김부기 대표
Q : 연구자의 길을 걷다가 창업으로 돌아선 이유가 뭔가.
A : 원래는 로봇 공학자가 꿈이었다. 공학 자체가 좋아서 공학도라면 너무 자연스럽게도 선배들이 걸었던 길인 연구원이나 또는 교수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지도교수께서 창업을 권유하셨다. 제자들 중에 연구자의 길이 아닌 새로운 분야로 나간 사람이 거의 없어 아쉽다는 말씀이셨다. 그게 창업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Q : 연구하는 사람의 제자가 연구하는 게 뭐가 아쉽나.
A : 지도교수님은 여러 기업과 공동연구를 많이 하셨다. 아쉬웠던 건 많은 연구과제가 상용화되기까지는 반드시 넘어야할 높은 벽이 있는데,대학 연구실에서는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학 연구실이 기술성숙도(TRLㆍ Technology Readiness Level) 9단계 중 4단계까지 간다면, 기업은 8~9단계의 상용화 단계에 이른 기술을 원한다. TRL 5~7단계는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교수님은 제자 중 누군가가 이 단계를 메워줄 스타트업 창업을 해주길 원하셨다. 우리 스스로 한번 그 벽을 넘어보자는 거였다.
Q : 왜 바나듐 배터리를 생각했나.
A :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한 ESS는 특성상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한 거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물을 전해질로 쓰기 때문에 리튬이온과 달리 불이 날 위험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태양광 발전과 함께 리튬이온 배터리 ESS 보급이 빠르게 늘어나던 초기에 화재가 한 두 건 발생하더니 이후로 국내에서만 연간 수십 건의 같은 화재가 이어졌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은 해외에서 사와야 하는 비싼 원자재인 반면, 바나듐은 국내에도 매장량이 많고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다. ”
Q : 그런 장점이 있는데 그간 왜 상용화가 안 됐나.
A : 사실 바나듐으로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건 30년 전에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루기가 어려웠다. 바나듐이라는 물질로 배터리를 만드려면 수명도 길고 안전하고 효율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를 만족하는 건 쉽지만, 동시에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하는 꿈의 배터리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초기에 개발된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라는 건 지금도 발전소 등지에서 ESS로 쓰고 있긴 하다. 하지만 흐름전지엔 액체전극을 흘릴 펌프와 펌프를 움직일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도 창업 후 4년간 흐름전지의 단점을 개선하는 연구개발하다 결국 접었다. 그리고 방향을 튼 게 펌프가 필요없는, 미세 유동기술을 이용한 바나듐이온 배터리다. 흐름전지를 접고 4년 만인 2021년 4월 세계 최초로 바나듐이온배터리 개발에 성공했다. 관련 특허만 140개, 이 중 60건이 미국 특허다. 160년 배터리 산업 역사상 우리나라에서 원천 기술이 시작된 유일한 사례다. 기술 개발에 성공하니 투자유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롯데케미칼의 경우 우리가 직접 찾아가 투자를 설득했다.
Q : 그렇게 매력적이면 롯데케미칼이 투자가 아닌 인수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A : 큰 기업이 유망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바로 인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초기에 지분 투자를 하고 교류하다가 이후에 인수하는 경우가 많다. 롯데가 스탠다드에너지를 처음 알고, 투자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앞으로 롯데케미칼과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지금 바나듐이온 배터리 사업을 이끌고 있는 전략적 파트너라는 건 확실하다. 롯데케미칼은 우리 배터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핵심 소재인 전극 소재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공급사이기도 하다.
Q : 바나듐이온배터리를 어디에 쓸 수 있나
A : 리튬이온배터리보다 크기 때문에 자동차나 모바일 기기에 쓰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하지만 발전소의 에너지저장장치, 전기차 충전소, 더 나아가서는 전기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저공해 선박 등 앞으로 적용할 곳이 많이 있다. 바나듐이온배터리는 전기로 움직이는 친환경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Q : 전기차 충전소는 왜 한 곳 뿐인가.
A : 바나듐이온배터리는 신기술이기 때문에 위험한지 아닌지, 효율은 어떤지 실제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5월 설치한 압구정 하이마트 전기차 충전소는 기존 규제를 기준으로 시범사업을 허가하는 샌드박스다. 지난 1년간 실증이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최근 한국전기설비규정(KEC)에 바나듐이온배터리가 포함됐다는 희소식을 받았다. 이제 거의 다 온 느낌이다. 현재 이미 설치된 전기차 충전소가 전국적으로 1만 개가 넘는다. 앞으로 전기차 보급이 더 늘어나면 충전소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화재로부터 안전하고 효율이 높은 유일한 배터리로 우리나라 전체 전기충전소를 모두 바꿔버리겠다.
Q : 외국의 ESS 시장은 어떤가.
A : 국내에서 연이은 화재 사고로 ESS 보급이 지지부진하는 사이에 해외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성장을 했다. 한국이 배터리 강국이라지만, 리튬이온 배터리에 쏠려있는 반쪽짜리 강국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애초 움직이는 전기차나 작고 가벼운 전자제품 용도로 만들어진 배터리다. 해외에서는 리튬이온이 아닌 신기술 기반의 다양한 ESS를 많이 도입하고 있다.
Q : 글로벌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나.
A : 글로벌 시장 진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선 국내 시장이 더 중요하다. 국내 ESS 시장은 해외에 비하면 완전히 죽었다. 이걸 살려내지 못하면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도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기술이 아주 매력적이긴 한데, 너희 나라에선 그걸 얼마나 쓰나’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첫째 목표는 침체된 국내 ESS 시장을 부활시키는 거다.
Q : 스탠다드에너지의 장기 목표와 비전이 뭔가.
A : 원래 처음 창업할 때는 배터리 소재로 시작했다. 지금은 배터리 회사를 거쳐서 이제 ESS 시스템 기업으로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에너지 유통회사가 되는 거다.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ESS를 기반으로 한 전력서비스 시장까지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2030년엔 연간 1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회사 이름처럼 전기가 흐르는 모든 곳에 우리 ESS 제품이 연결되는, ‘에너지의 표준’이 되겠다는 게 우리의 비전이다.
충전과 방전을 계속하는 2차 전지의 역사는 1859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가스통 플랑테가 납축전지를 발명하면서 시작됐다. 이후로 1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간 널리 상용화된 배터리는 납ㆍ니켈ㆍ리튬이온 세 가지에 불과하다. 스탠다드에너지 김 대표의 바나듐이온은 배터리의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한때 떴다가 져버린 무수히 많은 신기술 중 하나로 기억될까. 바나듐이온 배터리가 배터리 강국 대한민국의 새로운 축이 될 수 있다면, 이를 키워낼 책임은 김 대표뿐 아니라 한국 혁신창업 생태계 모두에게 있다.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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