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없는 게 철학', 영화 '길복순'의 진면목

안치용 2023. 4. 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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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길복순>

[안치용 기자]

 
▲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전선에 뛰어든 전설의 킬러 길복순 [안치용의 영화리뷰(영화평)] '길복순' ⓒ 안치용

영화 <길복순>은 청부살인업계의 전설적인 킬러이자 싱글맘인 길복순이,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숙명적 대결에 휘말린 상황을 그린 액션물. 2023년 3월 3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같은 엣지있는 대사 또한 유명하다.

지연된 클리셰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곳곳에 재기발랄이 넘쳐난다. 길복순(전도연)은 MK ENT라는 이벤트 회사의 직원이다. 청부살인업계로 극중에서 이 업계 사람들은 살인을 '작품'이라고 부른다.
 
  영화 <길복순> 포스터
ⓒ 넷플릭스
 
아마 신선하고 감각적이라는 우호적인 평과 함께 그저 그런 이야기를 포장만 휘황하고 번듯하게 바꾼 키치 풍이라고 하대하는 평이 병존하였으리라. 평만 그런 게 아니라 영화 자체가 그렇다. 관객을 웃게 할 여러 대목 중 하나가, 길복순과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한희성(구교환)이 길복순에 대거리하는 영화 초반부의 식당 장면에서 나온다. 한희성이 입은 티에 체 게바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길복순과 한희성 등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이 사람을 죽여서 생계를 유지한다. 체 게바라는 대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였다. 큰 차이지만, 결과로서 사람을 죽였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길복순과 한희성 또한 안중근이나 체 게바라와 마찬가지로 살인을 좋아해서 살인하는 건 아니다. 얼마나 유의미한지 모르겠으나 사이코패스·연쇄살인범과 청부살인업자는 구분된다.

그렇다고 동질감을 느껴서 한희성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은 건 아닐 것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면 얘깃거리도 아니다. 우연히 수중에 들어온 체 게바라를 무심결에 입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입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메시지이자 캐릭터 천명이다.

흔히 생각하는 청부살인업자, 또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현실의 킬러라면 한희성처럼 몸이 왜소하거나 표정에 살의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변 감독은 그런 사람을 킬러로 내세웠고 체 게바라를 입혔다. 어쩌면 체 게바라보다 루이비통이 더 어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역발상이 들어간다. 덜 어울릴 것 같은 선택이 더 어울리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청부살인업자답지 않은 의상감각으로 표출되는 건 키치이다.
 
  영화 <길복순>
ⓒ 넷플릭스
 
혁명가 체 게바라가 B급 청부살인업자 가슴에 떡 하니 자리하면서 '킬러' 개념의 키치적 연결이 일어난다. 말했듯, 이 연결은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 일어난다. 제작진이 관객을 위해 만든 연결이다. 현실에서는 청부살인업자가 체 게바라를 입든 존 레논을 입든 연결은 없고 살인만 있다. 가끔 체 게바라와 존 레논 얼굴에 핏방울이 튀는 정도이겠다.

아날로지는 두 사건 사이에서 공통 요소를 찾아내서 개념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연결을 꾀하는 요긴한 인문학적 방법론이다. 유비라고 번역되는 아날로지는 두 사건, 두 현상, 두 인물을 연결함으로써, 하나라는 독자적 상태에서는 생성되지 않는 새로운 관념이나 이미지, 느낌을 산출한다. 이 영화에서는 '킬러'라는 단어가 혁명가와 청부살인업자 사이에 연결을 만들며 추가적 이미지와 의미를 산출한다. 여기서 둘은 '사람 대 사람' 같은 식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티셔츠를 통해 있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키치이다. 그러므로 한희성에게 더 어울리게 된다.

이런 키치는 창의적이다. 왜냐하면 전술했듯 현실의 청부살인업자에 실현되지 않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청부살인업자 상을 만들어내어 관객에게 쏠쏠한 재미를 선사하는 게 결국 이런 종류 오락영화가 할 일의 하나가 아닌가.

아날로지를 통해 의미와 이미지의 확장이 종종 일어나는 것과 함께 소위 '우라까이'를 통해서도 새로운 문맥과 흥미가 발굴된다. 베껴쓰기 정도의 의미로 특히 언론에서 많이 쓰는 일본 말인 우라까이는, 원래 안감과 겉감을 뒤집어서 재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재활용이라고 하여 신제품을 쓰는 것에 비해 많이 부족할 것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안감이 겉감이 되면, 겉감의 느낌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안감의 새 질감을 추가로 부여하는 증폭이 때로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라까이가 좋은 방식으로 일어나면 영화의 신선도가 높아진다. 변 감독은 이런 쪽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듯하다.
 
  영화 <길복순>
ⓒ 넷플릭스
 
영화는 클리셰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참신하고 신선하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왜일까. 앞에서 거의 설명했으나 다시 파악해 보자. 황정민이 오다 신이치로라는 야쿠자로 나오는 첫 장면. 길복순과 오다 신이치로가 다정하게 담배를 나눠 피며 대화하는 소소한 지연을 거쳐 예상한 대로 결국 총을 쏜다. 클리셰를 클리셰 같지 않게 구성하는 힘이 필요하다. 지연된 클리셰는, 그냥 지연하기만 한다면 저렴한 데다 저질의 클리셰가 되지만 지연의 기술을 적당히 또 우아하게 구사한다면 관객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라까이의 용례를 떠올리면 되겠다.

상충하는 관계

주요 등장인물 간에 관계가 있는 건 당연하겠고, 여기선 대부분 상충이 목격된다. 길복순 모녀간, 길복순과 차민규(설경구), 길복순과 차민규의 동생인 차민희(이솜), 길복순과 한희성 등.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게 그려지는 건 길복순이 겪는, 직업과 엄마라는 역할 사이의 갈등이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갈등과 상충이 그려지지 않는다. 마지막의 쿨한 결말을 앞두고 길복순이 길복순답지 않게 울고불고하는 장면 정도가 예외일까. 이 영화의 특성상 그런 전개를 바라는 건 무리일 뿐 아니라, 그렇게 전개됐으면 인기를 끌지 못했을 터이다.

굳이 퀴어와 근친상간이 양념으로 뿌려지면서, 그러면서 건들만한 건 거의 전방위적으로 다 건드는 가운데 길복순을 향한 차민규의 순애보와 딸 길재영(김시아)을 향한 길복순의 모성이 결승전에 맞붙는다. 늘 그렇듯 어머니는 강했고 사랑에 빠진 자는 허약했다. 아무튼 해피엔딩이다.

길복순 없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말하는 차민규는 길복순 손에 죽어서 어쨌든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게 됐다. 차민규가 지옥을 모면하는 방법에는 길복순을 살리는 것 말고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있다. 차민규의 약점이 자신이라고 말하는 길복순. 과거 차민규가 길복순 아버지를 죽이러 왔을 때 미성년인 길복순이 아버지 살인의 목격자로 차민규로부터 제거될 위험에 처하지만, 살해되는 대신 자신이 살인자가 되고 차민규를 목격자로 만드는 기민한 변화를 만들어낸 그 시점에 두 사람의 승패는 예정돼 있었다. 사랑에 빠진 먼치킨은 절대강자 자리를 고수할 수 없다. 목격자는 살인자에게 제거되기 마련이다. 차민규는 길복순에게 패배한다.

차민규의 노림과 반대로 길복순 길재영 모녀의 관계는, 길복순이 그렇게 숨기고자 한 자신의 정체가 길재영에게 아주 날 것으로 밝혀진 뒤에 오히려 최상으로 복원된다. 길복순이 걱정한 것은 딸이 킬러 직종에 종사하는 엄마를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킬러라는 직업에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죽은 한희성 말대로 길복순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엄마가 좋은 엄마이기도 하고.
 
  영화 <길복순>
ⓒ 넷플릭스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있을 법한 것에다 때려 넣은 발랄한 혹은 허황한 구성력이 이 영화의 본질이다. 혁명에 쓸 영화도 아니고, 오락영화가 재미있으면 된 것 아닐까. 철학이 없다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다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철학이 없는 게 철학이지 않은가.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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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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