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르포]혼돈 속 미얀마‥韓, 투자의 끈 놓지 말아야
이번주 동남아 날씨는 연일 40도를 오르내리는 불가마의 연속이었다. 미얀마 양곤 국제공항의 입국 절차는 물흐르듯 매끄러웠다. 다른 나라와 큰 차이 없이 평범했다. 하지만 시내로 나가자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지 불꺼진 도심 풍광이 기이했다. 정전이 하루 8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으며, 밤 12시 이후부터는 강력한 통행금지라 거리가 일찌감치 한산했다.
2020년 코로나19 유행에 이어 2021년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자 미얀마의 경제 사정은 날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때 4000명에 육박한 우리 교민의 숫자도 급감해, 현재는 1500명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신남방정책의 최대 수혜지로 노동집약적 산업의 ‘제2의 베트남’으로 기대를 모은 미얀마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대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는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이제는 100여 개 의류·봉제 업체들이 저임금노동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멈춰선 공단 조성= "6개월, 아니 3개월 정도라도 빨리 분양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얀마 생활이 4년째에 접어든 이정욱 한-미얀마경제협력산업단지(KMIC) 대표(62)는 쿠데타 이후 2년째 한 발짝도 진전 없는 합작 공단 사업에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2011년 반세기가 넘는 군부독재를 끝마친 미얀마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기대는 상당했다. 한국 역시 이명박(2012년), 박근혜(2014년), 문재인(2019년) 대통령이 미얀마 방문을 이어갈 정도로 최대 후원자를 자임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본뜬 미얀마개발원(MDI) 사업과 달랏신도시 개발 사업 등 여러 굵직한 사업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프로젝트가 바로 양곤공항 북쪽 25㎞에 세워질 총넓이 225만㎡ 규모의 산업단지 조성 사업이다.
경제수도인 양곤 시내와의 접근성이나 노동력 수급조건이 좋은 만큼 많은 업체의 문의가 잇따랐다. 8년이 넘는 준비 끝에 2021년 분양 접수가 시작되자 신청이 쇄도했다. 분양 접수 시작 한 달도 안돼 터진 쿠데타는 상황을 정반대로 돌려 놓았다. 조금만 더 빨리 분양에 나섰다면 이제는 여러 공장이 바쁜 기계음을 울리고 있을까? 물론 정반대의 가정도 가능하다. 이 정도로 불안정한 나라에 투자를 피해 다행이라고 생각할 기업도 많을 거라는 얘기다.
"미얀마와 끈을 유지하고, 투자를 멈추지 말아야 해요. 비좁은 땅과 고령화된 한국의 산업구조를 감안하면 미얀마는 가장 이상적인 협력 파트너입니다."
천기홍 양곤 세종학당 교수(48)는 미얀마와 같은 정국이 불안정한 나라를 바라보는 한국의 미래지향적 자세를 주문했다. 즉, 국제 정세와 시류 변화에 따른 편가르기와 상호호혜적인 양국 관계를 혼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얀마 군부에 자금이 흘러갈 한국의 모든 투자를 중단하라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미얀마 군부를 비판하기 위해 만일 한국이 완전히 손을 놓아버리면, 그 빈 자리는 당장에라도 중국이나 러시아가 채울 겁니다. 그러한 편중이 오히려 미얀마 위기를 심화시키고, 한국의 미래를 잠식할 수 있어요. 이념과 실용을 함께 챙기는 전략적 관점도 꼭 필요합니다."
◇반기문, 깜짝 방문= 근래 미·중 대립 격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제 정세가 요동치면서 아세안, 그것도 가장 변방의 미얀마에 한국이 눈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서방세계는 인권유린과 민주주의 훼손으로 요약되는 미얀마 쿠데타에 대해 경제제재의 강도를 꾸준히 높여왔다. 미얀마 군부는 러시아의 석유와 중국의 생필품에 의존하며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미얀마식 군부체제를 고집하겠다는 것. 자연스레 지난 10년 가까이 협력사업을 늘려온 한국대사관이나 코이카 등 정부 기관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황. 미국과 일본이 관계개선을 재개하기 전까진 판단을 보류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군부와 시민군(PDF)으로 대표되는 미얀마의 ‘사실상의 내전’은 언제쯤 끝이 날 것인가. 현재 미얀마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핵심도시(양곤-네피도-만달레이)는 군부가 확실히 장악해 치안을 유지하는 중. 산악 변방과 국경 지역은 끊임없는 소요와 시민군과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얀마의 전체 면적은 한반도의 3.5배에 이를 정도로 광활하고 군사 장비가 닿지 않는 오지가 많아 독립 이전부터도 버마족과 소수 민족 간의 갈등이 치열했다. 이제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은 반군부 시민군이 소수 민족과 손잡고 길고 긴 전선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니 군부가 당황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군부는 올해 들어 상황 타개를 위해 무장한 전투기와 헬기를 동원해 반군 활동지역을 공중타격하는 비인도적 처사를 반복하고 있다. 중부 사가잉 지역에선 띤잔 축제를 앞둔 민간인 168명이 공중 폭격 때문에 몰살되는 일까지 벌어져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이성을 잃은 미얀마 군부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국제사회의 공감대도 날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4일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전격적으로 네피도를 방문해 실질적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과 떼인세인 전 대통령을 만나 평화 프로세스 실천을 강조하고 떠나기도 했다. 2년 넘게 국제사회와 단절된 채 구금 중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반 전 총장의 극적인 만남도 기대됐지만 성사되진 못했다. 다만, 반 전 총장이 국제사회의 냉정한 시선과 우려를 군부에 확고히 전달한 것에 미얀마 국민은 일말의 협상 가능성을 기대하는 눈치다.
◇꿈 잃은 젊은이= 양곤 시내는 전기가 부족한 것 빼고는 쿠데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얀마 통화 짯(kyat)의 폭락과 달러 가치 급등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시내 곳곳에 태국의 방콕을 본뜬 최고급 커피숍과 재즈바가 잇따라 들어선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젊은이들은 유행하는 카페를 찾아 소득수준 대비 부담스러운 가격의 커피와 먹거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미얀마의 중장년층은 젊은 세대의 이런 소비행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군부에 저항하는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대거 국경으로 떠났고, 상류층 자제는 싱가포르나 미국으로, 중산층은 돈을 벌기 위해 태국이나 일본 등지로 떠났다. 과거 청년 세대는 저축해 에어컨 있는 집을 사려 했다지만, 이제는 전기도 자주 끊기고 외국 공장은 문을 닫아 친구도 미래도 잃었다는 불만도 커진다. 자연스레 내구재 소비는 줄고 일종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식 소비를 즐긴다는 얘기다.
"1988년에 이어 2021년에도 수천 명의 젊은이가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군부는 여전히 탐욕스럽고, 정치세력은 타협의 가능성을 닫고 있어요. 참으로 우울합니다." 50대 현지 사업가의 푸념은 세대를 불문하고 번져 있는 미얀마인들의 상실감을 대변하고 있다.
정호재 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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