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교민 탈출 뿌리는 1975년 ‘십자성 작전’, 베트남판 ‘흥남 탈출’
교민 탈출은 성공, 일부 공관원 탈출 실패해 월맹군에 붙잡힌 건 큰 아쉬움
북아프리카 수단에서 정부군과 군벌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현지에 체류 중인 교민 28명이 우리 군의 작전 ‘프라미스’를 통해 위험 지역을 안전하게 벗어났다. 이 뉴스를 보는 예비역 해군 중령 이문학(86) 선일교회 원로장로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단 교민 탈출 원조는 ‘십자성 작전’
월남 패망을 앞두고 교민을 구출하기 위해 벌였던 ‘십자성 작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30일 월남(베트남)은 공산주의 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패망을 직감한 월남 정부는 우방인 우리나라에 자국 피란민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해 줄 것과 구호 물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정부의 요청을 받아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동시에 교민 탈출 작전을 허가했다.
국방부는 해군의 LST(전차 상륙용 함정) 두 척으로 구성된 해군 특수 수송 분대를 4월 6일 부산항에서 이역만리도 떠나보냈다.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 교민 구출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해군사관학교 14기로 당시 중령이던 이 장로는 해군본부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이 작전의 연락장교로 사이공(호찌민)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관’으로 급파됐다. 시시각각 변하는 월남 상황과 사이공강의 좁은 수로로 이동해야 하는 함정 사이를 통신으로 이어야 하는 중책이었다.
전쟁으로 사이공강의 정확한 해도나 조석표, 최신 항해 정보도 없었고 물속에 기뢰가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결국 십자성 작전은 성공했다. 4월 29일, 사그라져가던 월남 사람들을 피란민수용소가 있던 푸쿠옥에 내려준 뒤 교민을 비롯해 일부 월남 사람을 싣고 5월 13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에는 모두 1326명이 내렸다. 베트남판 ‘흥남 철수 작전’으로 불리는 이유다.
교민은 탈출, 공관원은 사지에
하지만 한국대사관 외교관들을 비롯해 이 장로와 일행 등 현역 군인들은 임무 수행을 위해 현지에 남았다. 결국, 이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해야 했다.
이 장로와 부사관들은 함정이 공해상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통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공관원들도 잔류한 교민들의 안전을 위해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월맹군의 남하 속도도 빨랐다. 자유의 시간도 그만큼 짧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이들의 최종 탈출로는 미국이 책임져 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이 약속은 어딘가에서 생긴 균열로 지켜지지 않았다.
오지 않는 미군 헬리콥터
지난 24일 경기도 광주 자택에서 만난 이 장로는 “FM 방송에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오면 즉각 미리 공지된 ‘어셈블리 포인트’로 이동하기로 미국과 약속돼 있었다”면서 “하지만 노래는 나오지 않았고 29일이 돼서야 인편으로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고 군인과 공관원들이 부랴부랴 약속된 장소로 갔는데 그곳은 헬리콥터가 내릴 수 없는 장소였으며 헬리콥터도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루 앞선 28일, 이 장로는 두 척의 함정에 마지막 전문을 보낸 뒤 외교관들과 함께 통신기와 기밀문서를 모두 소각했다. ‘대사관 전원 철수. 비상 파괴. 무운 기원’이라는 열다섯 자가 자유 세계로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셈블리 포인트에서 허탕을 친 군인과 외교관들은 망연자실할 새도 없이 미국 대사관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대사관 주변은 아비규환과도 같았다. 수많은 사람이 뒤섞여 언제 올지 모르는 미군 헬리콥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한국대사관 외교관과 현역 군인들도 던져졌다.
월맹군에 잡히며 평양에 끌려갈 수도
공관원과 현역 군인들은 남북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월맹군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평양으로 압송돼 북한 체제 선전의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컸다고 한다.
반드시 미군의 탈출 헬리콥터에 타야 했지만, 줄이 너무 길었다. 한국 대사관 식구들은 미 대사관 경비병들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안에 있던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갔다. 이곳은 미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수영장 같은 위락시설들이 있는 곳으로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는 대사관 본관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다. 여기서 밤을 지새웠다.
이 장로는 “기약 없는 시간이 무심히 흘렀다. 한국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부하도 두 명이나 있었다.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군복을 꺼내 갈아입었다”고 전했다. 군복을 입은 이 장로를 본 미군들은 그의 일행을 대사관 본관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미군의 대형 헬리콥터인 ‘치누크’가 간간이 본관 마당에 급조한 착륙장에 내렸고 그때마다 40명 남짓한 피란민이 몸을 실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100대가 더 온다고 해도 탈출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장로는 “초조한 시간이 흐르던 중 갑자기 헬리콥터가 아예 오질 않았던 적도 있었다.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고 보니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12시간 근무 후 반드시 한 시간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비상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부하들과 함께 앞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경비병들이 제지하면 현역 군인임을 상기시키고 ‘만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댔다”고 했다.
이 장로의 머릿속에는 서울의 가족과 고향의 부모님, 평양이 뒤섞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월맹군에게 체포돼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선명해졌다.
무조건 앞으로, 필사의 탈출
앞으로, 앞으로 향하던 이 장로 일행 앞에 드디어 치누크가 내렸다. 군복이 없어 입지 못 했던 부하들을 “내 가족이다”라 소개한 뒤 함께 헬리콥터에 탔다고 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장로는 “우리가 탄 헬리콥터 뒤에 아마 2~3대가 더 왔을 것 같다. 거의 마지막에 탄 셈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몇몇 외교관들이 월맹군에게 붙잡혀 그곳 수용소에서 4~5년을 복역하다 귀국했다. 실제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평양에서 수차례 공작원들이 왔다고 들었다. 북한 공작원들에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너무 큰 고초를 겪었다”고 회상했다.
48년이 지난 일을 꺼내 놓은 이 장로는 “공산주의 월맹에게 패망 직전 위험한 상황에서 교민을 철수시킨 역사상 유례없는 십자성 작전은 왕복 5000마일이 넘는 월남을 오가며 성공시킨 쾌거다. 당시 해군참모총장 출신 김영관 대사와 공관원들이 작전 지휘를 맡은 권상호 사령관과 휘하 장병들과 더불어 일치단결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이끌었다”면서 “신속한 상황 판단과 지휘 통솔력이 돋보인, 우리 해군만이 해낼 수 있는 해상 특수 임무 수행 작전이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 장로는 “다만 미 대사관이 주도한 헬리콥터 철수 작전은 일부 교민과 탈출에 실패한 공관원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을 주면서 미완의 작전이 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돌아보면 모든 게 하나님 섭리
이어 “물론 돌아보면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하에 일어났던 일들로 하나님의 세심하고 오차 없는 손길 아래 나의 걸음이 옮겨졌다”면서 “헬리콥터를 기다리던 그 시간, 마치 ‘엄마와 아빠’를 부르듯 하나님을 불렀었다. 자유가 이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옛날얘기를 꺼낸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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