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말한 '불나비', 만들고 부른 두 사람의 만남

하성환 2023. 4. 2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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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비' 민중가수 최도은, '불나비' 작사·작곡가 음성철을 만나다

[하성환 기자]

▲ 민중가수 최도은님이 펴낸 첫 콘서트 음반  민중가수 최도은님이 불렀던 '불나비'는 1981년 다울 야학 교사 음성철님(중앙대 3년)이 공장 노동을 했던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며 작사, 작곡한 노동가요다.
ⓒ 하성환
 
노동가요 '불나비'를 작사 작곡한 사람은 중앙대 경영대 무역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음성철이다. 공장 노동으로 지친 생활 속에서도 향학열을 불태우던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며 '불나비'를 만들었다. 야학 교사 시절, 그는 주머니를 털어 어린 제자들에게 떡볶이나 김밥을 사주곤 했다. 어떤 때는 동료 야학교사들 회수권을 모아 밤늦은 시각 어린 제자들이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중년이 되어서도 택시 노조위원장을 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지난 4월 18일은 음성철이 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 방방곡곡 파업 현장에 퍼뜨린 민중가수 최도은과 처음 만난 날이다.
 
▲ '불나비' 작사, 작곡한 음성철님과 '불나비' 민중가수 최도은님 '불나비'를 처음 만든 이는 다울 야학 교사 음성철님이다. 그는 1981년 중앙대 경영대 무역학과 3학년 당시, 이 곡을 만들었고 그해 중앙대 축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화시킨 민중가수 최도은님과 옛이야기를 나누다.
ⓒ 하성환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던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며 노동가요 '불나비'를 만든 옛이야기를 음성철이 하나둘 풀어내었다. 노동가요 '불나비'는 공장에서 열 시간 넘게 혹사당하던 야만의 시절에 맞서 어린 노동자들이 젊음을 불사르며 꿈을 찾아가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다시 말해 어린 학생들이 현실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담아 노래함으로써 노동자로서 꿈과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
1981년 '불나비'가 처음 탄생하고 이후 '불나비'는 마포구 성산교회를 다니던 야학 제자를 통해 인근 이화여대, 서강대, 연세대 학생들 사이로 애창되며 퍼져 나갔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 청계 피복 노조가 1980년대 노동 탄압에 맞서 고난을 이겨내려는 마음으로 널리 애창하였다. 당시 청계피복노조 어린 노동자들은 5공 정권의 노동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 사수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엔 처음 '불나비'가 만들어졌을 때처럼 조금 느리면서도 처연한 곡조로 불렀다.
  
▲ 최도은 님 첫 콘서트 음반에 수록된 '불나비' 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민중가수는 단연 최도은님이다. 최도은님이 1988년 세창 물산 파업 현장에서 처음으로 '불나비'를 불렀을 때는 1980년대 전반기 '불나비' 곡과 달리, 빠른 템포였다고 술회했다.그가 처음 펴낸 음반에 '임을 위한 행진곡', '인터내셔널가', '민중의 노래'와 함께 '불나비'가 수록돼 있다. 최도은님이 애창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불나비'인데 그 다음으로 애창하는 곡이 '혁명의 투혼'이다.
ⓒ 하성환
 
그러던 '불나비'가 빠른 템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민중가수 최도은이 '불나비'를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인천 지역 노동쟁의 현장에서였다. 당시 최도은은 인천 지역 노동 현장을 누비며 문화운동을 통해 강고하게 연대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시절 최도은은 파업 투쟁 현장을 고집한 민중가수였다. 현장을 지키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자고 함께 투쟁했다. 그리고 노래로써 노동자들 스스로 연대할 수 있도록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그것이 그 시절 문화운동을 펼쳤던 민중가수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안치환이 만든 '철의 노동자' 탄생 배경이 된 한독금속 노동쟁의 현장에서도 최도은이 함께했다. 무려 3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며 직장폐쇄에 맞서 투쟁했고 결국 노동자들이 병역 특례 혜택을 쟁취하는 기쁨을 함께 나눴다.

최도은이 '불나비'를 처음 노동 현장에서 선을 보인 것은 1988년 인천 지역 세창 물산 노동쟁의 현장에서였다. 당시 세창 물산 노동자 한 달 임금이 8만 원이었는데 상당수 노동자들이 상업계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낮엔 공장에서, 그리고 밤엔 야간 고등학교에서 주경야독하며 강행군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졸 초임 교사 임금이 40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한 달 임금 8만 원은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 세창 물산 노조 파업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절규이자 최소한의 생존권 요구 투쟁이었다. 최도은이 당시 불렀던 '불나비'는 빠른 템포로 투쟁의 열기를 한껏 북돋웠다. 나아가, 어린 노동자들에게 꿈을 잃지 않고 일어서서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불나비'는 파업 현장에서 노동가요가 지닌 오묘한 힘과 생기를 노동운동에 불어넣는 문화운동 특유의 무기였다.

1980~1990년대 운동권 노래 가운데엔 대학생들 자신이 직접 만든 곡들이 많았다. '바위처럼'을 만든 유인혁(본명 안석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전남대 김종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작곡한 연세대 안치환, '동지가'를 작사, 작곡한 전남대 박철환, '단결투쟁가'를 만든 한국체대 김호철, '광야에서'를 만든 성균관대 무역학과 문대현이 대표 사례다. 
 
▲ 1980년대 다울 야학 교사들과 민중가수 최도은님 1980년대 초 다울 야학에선 생월잔치 당시 '불나비'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찬송가 '우리 승리하리라'를 함께 불렀다. 야학 회장이었던 음성철님은 <다울 야학 회보> 맨 앞장에 독립군가를 실었고 맨 뒷장에 자신이 만든 곡 '불나비'를 실었다.
ⓒ 하성환
중앙대 무역학과 음성철이 만든 '불나비' 또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암울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나온 작품이다. 주경야독하는 어린 노동자들을 "하얀 꽃들"로 표현했다.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에서 '수레'는 그 시절 전국에 존재했던 200개 정도 야학을 가리킨다.
'불나비'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빠른 템포와 강렬한 반주, 그리고 힘찬 율동과 함께 집회 현장을 달군 최고의 민중가요였다. 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화 시킨 인물이 바로 민중가수 최도은이다. 그의 중량감 넘치는 성량은 집회 현장을 한순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96-97년 총파업과 2000년을 정점으로 '불나비'는 예전 같진 않다. '불나비'뿐만 아니라 오늘날 운동권 민중가요 상당수가 예전 같은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운동권 민중가요 상당수가 40대 임정득 가수를 마지막 세대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추세라고 최도은은 진단한다.
 
▲ 수요집회 당시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 선 학생들 수요집회를 마무리할 때 집회 참가자들은 항상 '바위처럼'을 함께 부른다. 민중가요 '바위처럼'이 예나 지금이나 20대부터 50대까지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 이유를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 하성환
 
그런 의미에서 '바위처럼'은 오늘날도 여전히 애창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금도 20대~50대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애창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수요 시위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노래가 바로 '바위처럼'이다. 운동권 민중가요이면서도 계속해서 강한 생명력을 갖는 이유에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생각건대 현 정권 들어서서 굴욕 외교 논란과 함께 노동 탄압이 가중되는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가요 '불나비'는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의 꿈과 희망을 담은 '민중의 노래'로 변함없이 사랑받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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