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는 법과 같은데... 법치주의 국가의 이상한 현상
[공현 기자]
▲ 4월 25일,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 출범 기자회견에서 전북 지역 고영주 교사가 발언하고 있다. (청시행 제공) |
ⓒ 청시행 |
"이미 학교 현장에서는 교육감의 태도를 감지하고 이전과는 다른 행태들을 보이고 있다. 일부 교사들은 다시 이전의 거친 언행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강제 야자를 축소하기로 했던 학교가 이전대로 밤 11시까지 야자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는 말도 들었다.
지난 4월 5일 재보궐선거를 앞두고는 '정치단체에 가입하지 말고, 가입했으면 교사한테 말하라'는 말을 담임에게 들었다는 학생도 있었다. 종교교육을 강요하는 사례도 최근 다시 나타나고 있다." - 4월 25일,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청시행)' 출범 기자회견에서 고영주 전북동화중학교 교사의 발언
전라북도의회에서는 최근 '전라북도 교육인권 증진 기본 조례'가 통과됐다. 학교 안 교육 주체들의 인권을 두루 보장하겠다는 조례는 얼핏 좋은 제도로 보인다. 문제는 이 조례를 만들면서 동시에 전라북도 학생인권조례의 구제기구와 인권 증진 정책기구 등이 크게 축소된다는 점이다.
위 발언은 바로 이렇게 학생인권 후퇴·축소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서거석 전북교육감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아직 바뀐 조례가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부터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인권에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전북에서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들은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의 학칙을 시행 중인 경기도 반송중학교 등굣길에 찾아가 학생인권 관련 전단지를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그때 반송중의 어느 교사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태희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폐지시키지 않았나?"
참고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2023년 올해도 건재하다. 2022년 7월 막 취임한 차였던 임태희 경기교육감은 단지 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의 의무와 책임도 강조해야 하고 교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학교 현장에서는 마치 이미 학생인권조례가 무효화된 양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감의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는 학생인권이 학교에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는 학생인권조례에 별다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분명 '법'이다. 상식적으로는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시장이나 도지사가 바뀌었다고 해서 이미 제정된 법이 갑자기 힘을 잃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권력자가 법을 고치지 않은 채로 있는 법을 사문화시키거나 집행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는 교육감이 학생인권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그 영향력이 반감된다.
일각에서의 오해와 달리 학생인권조례는 강제성이 매우 약하다. 학생인권조례에 똑똑히 나와 있는 학생의 권리를 학교가 침해하더라도 바로 처벌받거나 강제적 시정 조치가 이뤄질 수 없다.
대부분 지역의 학생인권조례는 인권침해에 대해 교육청의 학생인권옹호관 등에 구제 신청을 해도, 조사 후 개선 권고 조치가 내려질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인권조례에 위배되는 학칙을 갖고 있는 학교들이 조례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은 지역에서도 숱하게 발견된다.
학생인권조례는 점진적으로, 홍보와 교육, 모니터링과 컨설팅 속에, 학교 구성원들의 소통과 학칙 개정 과정을 거쳐 학생인권 현실을 개선케 하려는 제도이지, 어기면 바로 처벌당하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그런데 이는 달리 말하면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시행에 의지를 갖지 않으면, 심지어 학생인권을 축소시킬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면 학교 현장에선 학생인권조례를 너무나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례 자체에는 강제성이 약하기에 이를 학교 현장에 적용하고 노력하려는 책임자가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하게 돼 버리는 것이다.
지금 전국적으로 학생인권 후퇴 및 축소 분위기가 일고 있는 게 한층 더 우려스러운 까닭이다. 경기도나 전북과 같이 교육감이 학생인권에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하거나, 서울처럼 시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후퇴를 시도하면 수많은 학교 현장에서는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학칙과 관행을 부활시키려 든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에서의 학생인권조례 후퇴를 지켜보며 '우리도 좀 더 세게 잡아도 되겠구나'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 출범 기자회견 (청시행 제공) |
ⓒ 청시행 |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4는 "학교의 설립자·경영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에 학생인권 보장 의무가 있다는 취지다.
그런데 인권 보장 의무는 1차적으로는 국가에, 정부에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교육부, 교육감과 교육청에게도 학생인권 보장의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교육부도 교육청도 학생인권 보장은 부차적 문제인 양 이야기해왔다. 교육부가 학생인권 사안은 지역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할 문제란 식으로 떠넘긴 것도 문제고, 일부 교육감들이 학생인권 보장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것도 심각한 문제다.
4월 25일,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청시행)이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다. 18세 선거권 등 청소년 참정권 확대를 이뤄낸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청소년인권 보장을 위한 전국적 행동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속에 재출범한 연대단위로, 인권교육센터 들, 투명가방끈,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등 전국 55개 단체가 모였다.
청시행이 밝힌 1차적 과제는, 교육감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며 학교에선 '폐지되지 않았나?' 소리를 듣는 학생인권조례를 지키는 것이다.
나아가선 연대체 이름에 명시돼 있듯이, 전국에 적용되는 좀 더 확고한 학생인권법(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만들고 청소년인권 전반을 신장시키는 것이 목표다. 학생과 청소년의 인권이 확고한 우리 사회의 상식이자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 시민들의 더 많은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은퇴하면 이들처럼? 믿는 구석 있는 노인들
- 윤 대통령 "한미 핵협의그룹, 북한에 신속·압도·결정적 대응"
- 미 언론 "워싱턴 선언, 한국 안심시켜 핵무장 막으려는 것"
- 아파트 'ㅅ' 주차장을 아시나요
- 입당 전 윤석열에 '투자'한 국회의원은?
- 문재인 전 대통령이 만든 평산책방, 첫 손님이 됐습니다
- "MBC 보도 막아달라" 샘플 문자까지 보낸 김영환 지사 보좌관
- 야당 '김건희 특검법' 추진에... 국힘 "연진이 되려는가"
- 제주 땅값, 전국 평균 대비 무려 6배 하락... 토지거래량도 급감
- "민주당의 진짜 위기는 사법리스크 아닌 신뢰리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