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실명하는 ‘시신경 척수염’ 효과 좋은 신약 있지만 ‘그림의 떡’
갑자기 실명하는 ‘시신경 척수염’ 신약 있지만…
◇시신경염도 척수염도 아닌 '시신경 척수염'
어느 날 갑자기 실명할 수 있다고 알려진 시신경 척수염(시신경 척수염 범주질환)은 자가면역 희귀질환이다. 이름처럼 이유 없이 면역계가 자신의 시신경과 척수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뇌를 침범하는 중추신경계 질환에 속한다. 아시아인의 유병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며, 국내 유병률은 인구 10만명당 3.6명 정도다. 환자의 90%가 여성이며, 어느 연령대에서나 발병할 수 있으나 30~40대에서 가장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보고된다.
가장 잘 알려진 시신경 척수염 증상인 실명이나 사지·몸통 마비 등의 증상은 대부분 재발했을 때 발생한다. 첫 발병과 동시에 실명이나 마비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재발이 문제다. 단 한 번의 재발만으로도 시력 상실이나 전신 마비가 생길 수 있다. 재발증상 강도가 첫 발병 때보다 약하더라도 재발이 반복되면 5년 내에 62%가 실명하고, 50%의 환자는 휠체어를 타야 할 정도로 운동 기능을 상실한다.
시신경 척수염은 시신경염이나 척수염과 다른 병이다. 시신경염은 시신경에만 이상이 생겨 안구 통증이나 시력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척수염은 사지나 몸통 근육의 마비, 저림, 감각 이상 등의 증상만 나타난다. 반면 시신경 척수염은 중추 신경인 시신경과 척수에 모두 염증이 생겨, 대부분 시신경염이나 척수염보다 심각한 마비나 시각장애가 나타난다. 중증도는 개인차가 있으나 증상이 약해 인지하지 못하거나, 단순히 피로가 누적문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이다. 멈추지 않는 딸꾹질과 메스꺼움, 기면증이나 급성 간뇌증후군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증상이 비슷한 다발성경화증과도 다르다. 약 40%의 시신경 척수염 환자가 다발성경화증으로 오진 됐다는 보고가 있을 만큼 두 질환의 증상은 비슷한데, 시신경척수염에서 증상이 더 심각한 시신경염 또는 척수염 증상이 나타난다.
◇"재발만 막는다면 OK" 실명·마비 막을 기회 있는 병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민주홍 교수는 "시신경 척수염은 뇌경색처럼 4시간 이내에 치료해야만 시력상실이나 신체마비 등을 막을 수 있는 병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가 빠를수록 예후가 좋지만, 증상이 나타난 후 일주일 안에만 고용량 스테로이드 용법이나 혈장교환술과 같은 급성기 치료를 해도 증상 개선은 물론 후유증 최소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급성기가 지나면 시신경 척수염의 재발을 막기 위한 진짜 골든타임이 시작된다. 시신경 척수염의 재발률은 80~90%로 매우 높고, 재발이 일어날 때마다 시신경과 척수신경이 손상돼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확률은 커진다. 고용량 스테로이드 등으로 급성기 치료를 제때 받았더라도 재발확률이 줄어들진 않는다. 첫 발병 이후부터 모든 순간이 골든타임인 셈이다.
국립암센터 신경과 김호진 교수는 "시신경 척수염 치료의 핵심은 재발을 막아 영구적인 장애가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라며, "급성기 치료가 물에 빠진 사람을 일단 건지는 것이라면, 재발을 막는 치료는 사람을 살려 회복시키는 일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피부나 간 등 재생이 되는 조직과 달리 신경조직은 재생되지 않아 망가지면 영구적인 기능 손실이 발생한다"며, "시신경 척수염으로 인해 중추 신경이 손상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치료를 하고, 재발 방지치료를 통해 치료 상태를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다행히 시신경 척수염의 재발을 막는 여러 종류의 치료제가 존재한다. 치료제는 크게 1차 치료제와 2차 치료제로 구분된다. 보험급여가 적용되는 대표적인 1차 치료제는 면역억제제인 ▲삼일제약 '이뮤란', ▲종근당 '마이렙트'가 있고, 2차 치료제로는 림프종이나 백혈병 등에 사용하는 항암제로 익숙한 '리툭시맙' 성분이 있다. 저용량 스테로이드와 함께 1차 치료제를 병용하거나 번갈아 사용하다가 효과가 없으면, 리툭시맙을 사용하는 식이다.
리툭시맙이 효과가 없는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정식 시신경 척수염 재발치료제로 미국 FDA에서 인정받은 신약도 3개나 있다. 현재 시신경 척수염 치료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식 허가를 받은 약은 ▲알렉시온의 '솔리리스(성분명 에쿨리주맙)' ▲로슈의 '엔스프링(성분명 사트랄리주맙)' ▲미쯔비시다나베의 '업리즈나(성분명 이네빌리주맙)'이 있다. 3개 약제 모두 재발 위험률을 낮추는 효과가 좋다. 각각의 임상시험 결과를 보면, 대조군 대비 재발 위험률은 솔리리스 0.06, 엔스프링 0.38, 업리즈나 0.272로 재발로 인한 장애를 막는 데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민주홍 교수는 "1차 치료제인 이뮤란과 마이렙트은 70~80%까지, 2차 치료제 리툭시맙은 80~90%까지 재발률을 감소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실제로 약물을 사용했을 때 재발을 하지 않는 환자는 이뮤란·마이렙트가 약 50%, 리툭시맙은 60~70%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효과 좋은 신약 ‘그림의 떡’… 급여기준 개선 절실
문제는 시신경 척수염의 재발을 막을 약이 여럿 존재함에도 사용이 제한된단 것이다. 시신경 척수염으로 인한 신경손상과 그로 인해 발생한 장애는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첫 발병 이후 골든타임에 재발 방지 효과가 확실한 약을 최대한 빨리 사용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약을 먼저 쓴 다음, 상태가 악화해야만 효과가 더 좋은 약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단순 면역억제제인 1차 치료제보단 표적항암제인 2차 치료제의 효과가 좋은데, 현재 보험 체계에선 1차 치료제에 실패해 상태가 나빠져야 2차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다.
김호진 교수는 "환자들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그나마 더 효과가 좋은 약을 나중에 써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시신경 척수염은 한 번 나빠지면 되돌릴 수 없는 질환이라 효과적으로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약을 바로 사용해야 한다"며, "효과가 떨어지는 약을 써서 재발 방지에 실패해야만 좀 더 나은 약을 쓸 수 있게 하는 정부의 방침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보험 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만, 보험 재정 측면에서도 효과가 좋은 약을 먼저 사용하는 게 경제적이다. 국립암센터가 2020년 발표한 연구를 보면, 리툭시맙을 1차 치료제로 투약한 환자의 평균 연간 직접 의료비용은 545만7000원이었으나 2차 치료제로 리툭시맙을 사용한 환자의 평균 연간 직접 의료비용은 1004만 원으로 약 2배 높았다.
재발 방지 효과가 확실한 신약 중 우리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솔라리스, 엔스프링, 업리즈나는 국내 허가만 받았을 뿐, 보험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 1년 약값으로 솔리리스가 약 4억 8000만원, 엔스프링은 2억1000~5000만원이 든다. 재발을 막으려면 평생 써야 하는 치료제임을 고려할 때, 보험급여가 적용되지 않으면 환자는 천문학적인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민주홍 교수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여러 신약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보험 상황에선 고가의 신약 사용이 어렵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시신경 척수염은 암의 '완전 관해' 개념이 적용되지 않아 치료제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데, 면역억제제인 1, 2차 약들을 계속 사용하면 감염 등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며,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의 급여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보험급여라는 큰 걸림돌이 있음에도 시신경 척수염은 희망이 존재하는 질환임을 강조했다. 과거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해 시력 상실, 마비 등의 후유증이 생겼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아나운서, 영어 교사 등으로 활동하는 시신경 척수염 환자가 여럿 있다고 전했다.
김호진 교수는 "아직 비용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나 시신경 척수염은 새로운 무기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병이 됐다"며, "진단과 치료가 어려웠던 기존 환자들도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최근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용기를 잃지 말고 치료를 잘 받아달라"고 밝혔다.
민주홍 교수도 "시신경 척수염은 조기 진단과 적극적인 치료로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급여 말고는 치료 과정에서 큰 걸림돌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질환이니 지나친 걱정과 절망보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치료에 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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