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오면은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이호영 기자]
"기역, 니은을 조금 알았는데, 글자 대부분은 시아버지께 배웠어요. 언니들은 학교를 다녔지만 저는 학교는커녕 글자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에 시집 와서 시어른께서 '여자도 글자를 알아야 한다'면서 잘 가르쳐 주셨답니다."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사무실에서 가사를 짓고, 쓰기에 여념이 없는 한 할머니의 말씀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85살, 토끼띠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는 흘림체 붓글씨로 가사를 베끼면서 우리글 한글 쓰기 재미에 푹 빠졌다.
"여기 나오면은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친구들을 만나고 글씨도 쓰고, 아파서 한동안 나오지 못하면서 공부방이 그리웠어요."
▲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공부방 내방가사를 필사하고 있는 어르신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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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쓰고 있는 글은 내방가사로,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이 향유한 가사 문학이다. 남성 주도의 한문 문학 전통에서 한글로 지은 4음보 연속체이다. 내방가사는 18세기 이후 유행했다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안동에서는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1997년에 시작한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덕분이다. 75살 이선자 회장이 오늘날까지 사비를 털어 3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내방가사는 여성의 문화유산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0여 명의 회원이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동안 다녀간 회원들만도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활발하다.
매주 수요일 오전과 오후 보존회 사무실은 '내방가사' 공부방이 돼 가사를 짓고 쓰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개방한다. 참가 중인 할머니들은 대부분 60대에서 80,90대이다.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가사를 창작하고 좋은 가사를 베끼고 쓴다. 또 낭랑한 목소리로 읽으면 그 내용을 듣고 다른 할머니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 내방가사 '원한가'를 필사하는 모습 올해 85살인 어르신이 '원한가'를 필사하고 있다. 할머니는 내방가사를 통해 한글쓰기에 재미를 들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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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방가사의 기록은 대부분 어머니에게서 딸로,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전수되는 과정을 거친다. 경북 지역에서는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내훈의 일종으로, 또 아이가 잘 살기를 바라는 심정 등으로 가슴 속의 이야기를 내방가사로 지어 딸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승된 여성들의 가사문학이 오늘에도 유지 발전될 수 있었다.
내방가사는 특히 지난해(2022년) 11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등재된 내방가사는 1794년 조선 시대부터 1960년대에 이른 작품 348점으로 한국국학진흥원과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오래된 내방가사는 지난해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세계기록으로 지정돼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현재도 내방가사를 생산하고 있는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의 형편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회장인 이순자씨가 1997년부터 보존회를 유지하면서 사무실 운영비와 회원들의 점심비 등 대부분을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시집올 때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내방가사를 나이가 들어서 다시 기억해내고 이것을 보존하고 전승해야겠다는 생각 일념으로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어요. 내가 좋아서 시작했고 내가 좋아서 유지하고 있지만 75살에 이르면서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고 힘 닿는 날까지 운영하려고 합니다."
▲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이선자 회장 이선자 회장은 어머니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내방가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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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방가사가 아시아·태평양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가치는 이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특히 많은 교수와 학자가 내방가사를 공부하고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을 정도로 학문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뤘다. 오래된 내방가사 못지않게 현재도 생산되고 있는 내방가사를 살리고 더욱 잘 보존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현재도 공부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안심하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절실하다. 생산되고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후손들에게 내방가사를 전수할 수 있고 내방가사를 통해 인성 개발 등 기록유산가치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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