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명 몰린 '노병' 맥아더 연설…라이벌의 마지막 호의였다 [Focus 인사이드]

남도현 2023. 4. 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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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이상의 장군

1951년 4월 25일, 한 퇴역 노병이 연설을 시작했다. 1899년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52년간 군인의 길만 걸어왔던 그는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고 그동안 시민들이 보내준 성원에 대해 인사를 표했다. 당시 그를 보려고 강연장을 찾은 인원이 무려 5만 명이었는데, 이는 지금도 중요 스포츠 이벤트나 콘서트 정도에서나 가능한 규모다.

1951년 4월 25일 해임돼 본국에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시카고에서 5만의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 거대한 행사의 주인공은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였다. 이후 여러 과오가 밝혀지면서 업적이 재평가됐지만, 당시에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공을 세웠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37년 퇴임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현역으로 복귀해 태평양 전선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인류사 최대의 전쟁에서 대미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주재하고 이후 일본을 군정 통치했다. 50년 북한의 침략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는데도 앞섰다. 한마디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던 군인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인기가 많던 그가 퇴임하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2차 대전에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그는 일본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원할 때까지 원수의 계급장을 달고 있을 수 있었다. 당시 미 군부에서 직책상으로 상관들은 까마득한 후배들이었고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자신의 부관 출신이었다.

그런데 6ㆍ25 전쟁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며 일본의 통치자로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를 다시 최일선으로 불러냈다. 워낙 한반도의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지휘와 관련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런데 사실 둘 사이의 관계가 이전부터 그다지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50년 10월,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전황을 보고하라고 하자 바빠서 워싱턴에 갈 수 없다며 결국 대통령을 한국과 미국의 중간 지점인 웨이크섬까지 오도록 만들었을 만큼 맥아더의 위상은 대단했다. 트루먼은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맥아더의 높은 대중적 인기와 6ㆍ25 전쟁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며 승기를 잡았던 직후여서 그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했다.

트루먼은 기분이 나빠도 조속히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을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요구를 감내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웨이크섬에서의 회담이 끝난 직후에 등장한 중공군의 존재는 그처럼 자신만만했던 맥아더의 퇴장을 촉진했다. 북진에 나선 유엔군은 거짓말처럼 순식간 밀려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웨이크 섬에서의 회담을 끝내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을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오도록 만들었을 만큼 맥아더의 권위는 대단했다. 위키피디아

마지막을 함께 한 용사의 구장

오랫동안 1ㆍ4 후퇴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부되었지만, 사실 중공군 참전 직후인 50년 11월 당시 피아의 병력은 40여 만으로 대등했고 오히려 화력은 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별다른 교전 없이 패주를 거듭하여 아군이 37도선까지 밀려났다는 것은 결국 잘못된 지휘에 따른 결과다.

잘못된 북진 방법 때문에 통일을 목전에 두고 눈물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이러한 오판의 최종 당사자였고 이는 그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 NARA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국 정부는 휴전을 고려했지만,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맥아더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오히려 확전을 주장했다. 공공연히 핵폭탄 사용까지도 언급했다. 더구나 자신의 권위를 더욱 부각하기 위해 미군이 아닌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입장에서 공공연히 워싱턴 당국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서 트루먼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맥아더가 지휘를 계속하는 한 불화가 더욱 격화할 것임이 명확해졌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타전됐다. 세계는 놀랐으나 사실 맥아더는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해임을 당하여 군복을 벗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소신이 아니더라도 워싱턴에서 확전을 거부했다면 군인인 맥아더는 따라야 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생긴 오점을 조속히 지워버리려는 조급증 때문에 맥아더는 정치적으로 행동했고 결국 무리수를 두면서 군복을 벗었다. 그런데 맥아더의 해임과 재(再) 북진의 좌절만 부각되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트루먼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었다.

그러나 정작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의 즉각 참전을 결정한 것은 트루먼이었고,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결정적 선택이었다.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베푼 마지막 호의는 본국으로 소환하여 의회 연설, 퍼레이드 그리고 각종 대중 행사에 참석하여 전쟁 영웅으로서 대접을 톡톡히 받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했던 여정의 대미가 처음 소개한 것처럼 5만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실시한 연설이었다. 행사 장소가 현재 프로 미식축구단 시카고 베어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솔저필드(Soldier Field)였는데, 우리말로 옮기자면 ‘용사의 구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퇴역 군인을 위한 행사 장소로 가장 적합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영웅에 대한 대접 못지않게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부분은 어쩌면 맥아더가 마지막으로 연설한 솔저필드라 할 수 있다. 24년 건립된 이 운동장은 제1차 대전 참전 용사를 기리기 위해 시의회의 결의를 거쳐 이름이 붙여졌다. 대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에 참전 용사와 군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솔저필드의 최근 모습.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지어졌고 1924년 건립된 후 수차례 고쳐졌다. 위키피디아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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