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렌가테이와 WP 인터뷰의 차이
#1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렌가테이 2차 모임'의 한 토막.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도착 세 시간 전부터 구석 한쪽에는 한 장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삿포로 맥주 따르기의 장인. 원래 렌가테이는 산토리 맥주만을 취급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삿포로 맥주 '에비스'의 팬이란 이야기를 일본 총리 관저가 입수했다.
설득 끝에 이날 하루만 삿포로 맥주 통을 들여왔다. 최상의 비율로 거품을 얹는 삿포로의 최고 장인까지 모셔왔다. 만반의 준비였다.
회식 자리에선 윤 대통령의 입담에 기시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회동 다음 날 기시다는 아침부터 술 깨는 약을 여러 개 마셨다고 한다.
48분간에 불과했지만 짧고 굵은 술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총리 주변에선 "2019년 아베-트럼프 정상회담 이후 가장 신이 나고 인상 깊은 회동이었다"고 한다.
'반성' '사과' 발언을 얻어내지 못해 '굴욕 외교'란 비판을 듣지만, 적어도 정상 간 '스킨십'만큼은 강렬했다.
#2 윤 대통령 비슷하게 강한 스킨십을 지녔던 지도자는 김영삼이었다.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와의 만찬 뒤 하시모토 총리의 손을 잡고 나오며 외친 한마디.
"야, 이제 야가 나를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주변 참모들은 얼음이 됐다.
1993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시엔 '하우 아 유(How are you?)'를 착각해 '후 아 유(Who are you?)'라고 했다.
다행히 클린턴이 "난 힐러리 남편"이라고 웃으며 넘겼다.
두 지도자 간 차이도 있다.
김영삼은 눌변, 윤 대통령은 다변(多辯)이다. 정치 경력 차이도 크다.
그래서인지 김영삼의 말실수는 인간적인 것으로 미화됐지만, 윤 대통령의 말실수는 검찰 출신 아마추어의 설화로 비난받는다. 윤 대통령으로선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정치가 빡빡해졌고, 국제정세도, 언론 환경도 변했다.
대통령의 실수만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도 많다.
사석에서의 친화력과는 별개로 공적인 자리에서의 '안 해도 될' 한마디는 치명적이다.
#3 윤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대통령실은 즉각 "이런 식의 접근이 미래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원문 따로, 취지 따로'의 설명이 거듭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장병 앞에서 한 "UAE의 적은 이란"이란 발언이 외교 문제가 되자 외교부는 "장병들 열심히 근무하라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우리도 핵을 가질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문제가 되자 "그건 국민을 지키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원문과 취지 어느 쪽이 진짜 대통령 생각인가, 어느 쪽이 대한민국 입장인가.
WP 인터뷰로 곤욕을 치른 뒤 미국에 도착한 윤 대통령은 미 N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도청 관련 '친구가 친구를 염탐하냐'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현실 세계에선 국가 간 금지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 의사를 묻는 말에) 살상무기도 공급해야 할 때가 온다면, 전선의 상황이 달라진다면, 한국이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을 외면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훌륭했다. 짧고 밋밋하지만 정제된 답변이었다.
다변과 달변은 다르다. 이렇게만 대통령이 답하면 된다.
# 첨언: 대통령실은 WP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며 한글 원문에서 주어를 뺏다.
여당 대변인이 이걸 보고 "WP가 오역한 것"이라고 들고 나섰다.
그러다 기자가 SNS에 한글 원문을 올리자 모두 머쓱해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WP 본사 측은 오역 주장이 나오자 오디오까지 공개하려 했다가 말았다 한다.
'원문'보다 더 창피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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