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붙고, 말라죽고… 동복호·지리산이 보내는 이상 신호 [이슈&탐사]
기후위기 비명, 그곳에 가보니…
2년 전 저수지 한가운데였던 곳이 무성한 잡초와 함께 갈라진 흙바닥을 드러냈다. 지도상 물이 가득한 것으로 그려진 곳을 사람이 걷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언젠가 저수지에 함부로 버려졌을 아이스크림 쓰레기 봉지가 모습을 보였다. 봉지에 표기된 권장소비자가격은 최소 13년 전의 것이었다. 전남 화순 동복호를 16년간 관리했다는 최모씨는 “저수지 바닥을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후위기는 먼 나라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며 현재 국내에서도 다양한 이상기후 징후가 감지된다. 호남 지역은 유례없는 가뭄으로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냈고, 고산지대에서는 침엽수가 집단 고사(枯死)해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제주 지역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보행로가 잠긴 관광지가 생겼고 녹조류가 사라진 바닷가는 사막화하고 있다. 자연은 먼저 위기를 알고 신호를 보낸다. “처음 본다”는 신호들을 해석할 책임은 사람들에게 있다.
지난 10일 국민일보가 찾은 동복호에서는 물줄기는커녕 웅덩이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할 흙바닥에 거미들이 거미줄을 쳤고 갈라진 땅에 잡초가 가득했다. 화순군의 명물 기암절벽인 화순적벽에는 누가 일부러 그은 듯한 진한 가로선이 보였다. 수위가 낮아지면서, 오랜 기간 뭍과 물의 경계였던 곳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동복호를 오래 지켜봤다는 이들도 “처음 본다”며 명확한 원인을 모른다고 했다. 으레 닥친 가뭄의 모습과 다르다는 증언은 공통적이다. 댐을 관리하는 광주시 상수도사업본부의 김정석(40)씨는 “2020년에는 오히려 만수(滿水)가 돼 물을 방류할 정도였는데 2~3년 만에 물이 거의 빠져 버렸다”며 의아해 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2021년 촬영한 항공사진은 동복호에 물이 가득 들어찬 모습이다. 불과 2년 만인 지난달 말 동복호 담수율은 18.8%에 그쳤다.
화순군 상하수도사업소의 김정우(34)씨는 동복호 수위 저하에 대해 “적어도 201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수위가 많이 낮아진 전례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16년째 저수지를 지킨다는 최씨는 “바닥 드러낸 저수지를 처음 본다는 건 나뿐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 모두”라고 말했다. 그는 “물이 80~90%는 차 있어야 정상”이라고 했다.
광주시민 143만명과 화순군민 6만명의 주요 식수원인 동복호 수위 저하는 그 자체로 비상사태다. 화순군 이서면에서 만난 김광진 전남댐주민연합회장은 “다음달 말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제한급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광주 지역의 제한급수는 1993년이 마지막이었다. 김 회장은 “이제는 식수로 부적합한 영산강 지류에서 물을 끌어온다. 주민들은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는 하선희(65)씨는 “지금 씨를 심고 6월부터는 수확을 해야 하는데, 가뭄이 계속되면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육지와 분리된 작은 섬마을은 물을 구할 방도가 제한돼 피해가 더 크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지난 3월부터 ‘2일 급수 6일 단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2일간 수도가 나오면 이후 6일간은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다. 주민 7000여명의 식수를 책임지는 보길저수지 저수량이 10%대 초반까지 떨어진 데 따른 고육지책이다.
이 섬마을에서 80년 가까이 살았다는 김종덕 보길면 노인협의회장은 “원래 비가 풍족하게 내리는 지역은 아니지만 지난해부터 유독 가뭄이 심하다”고 말했다. 김현주 보길면장은 “식당에서는 생선을 바닷물로 씻고, 어민은 바닷물에 옷이 절어도 빨래나 샤워를 못한다”고 말했다. 보길도 초등학생들은 부모님들로부터 뛰어놀 때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를 듣는다. 어린이들 스스로도 빨랫물을 많이 쓰게 될 것을 걱정한다.
해발 1915m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은편 숲을 바라보면 한겨울 눈밭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녹색 일색이어야 할 숲을 흰색으로 채운 건 백화(白化)한 침엽수들이다. 잘 모르고 보면 장관인 풍경의 실상은 한국 토종 수종 구상나무의 집단고사 현장이다. 추운 기후에 사는 구상나무는 지리산 해발 1600m 지점부터 하나둘 만날 수 있다. 대개는 눈을 맞은 듯 흰색으로 변해 있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모습이다.
다른 요인을 모두 배제한 채 구상나무 죽음의 원인을 단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온의 상승을 빼놓고는 집단고사를 설명할 길이 없다. 27년째 침엽수 고사 실태를 연구하는 서재철 녹색연합 상근전문위원은 “한국의 봄과 겨울 평균기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며 물이 부족해졌고, 스트레스를 받은 나무들이 집단으로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정 수종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고사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2010년 한국의 구상나무를 ‘적색목록’에 등재했다. 멸종위기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땅한 해결책 없이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구상나무의 죽음이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생태계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 산사태 피해를 부를 확률이 높다는 점은 더욱 큰 걱정거리다. 서 위원은 “나무가 죽으면 뿌리가 지반을 붙드는 힘이 약해져 산사태에 취약해진다”고 했다. 지리산 인근 산사태 발생 지역과 구상나무 집단고사 지역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것이 그의 연구 결과다.
지난 20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서는 앞바다를 향해 돌출된 용머리 해안 탐방로 위를 거센 파도가 쉴 새 없이 덮쳤다. 매표소에는 “파도로 인하여 관람을 통제한다”는 안내가 붙었다. 관광객 몇이 울타리 너머로 탐방로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용머리해안기후변화홍보관의 고순영 해설사는 “탐방로가 오늘로 닷새째 종일 통제됐다”고 말했다.
제주 용머리 해안은 한국 기후변화 1번지로 불린다. 관광객 보행을 도우려 만든 탐방로가 해수면 상승 폭을 따질 수위계가 됐기 때문이다. 1987년 탐방로가 처음 조성됐을 때에는 물에 잠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서귀포시는 해수면이 점차 상승하자 2008년 탐방로 위에 한 층을 높인 석재다리를 설치했다. 최근엔 이 석재다리마저 물에 잠길 때가 많다. 물에 잠길 때마다 탐방로를 통제하다 보니 2021년에는 ‘종일 관람’이 가능한 날이 연중 단 6일이었다.
송악산과 용머리바위 사이 바다에서 수십년간 해녀로 살아온 사계마을 해녀회장 김인선(64)씨는 해수면 상승을 체감한다고 했다. 김씨는 “두렁박(테왁)에 줄을 걸어놓고 물질하는데, 썰물도 세고 들물(밀물)도 세서 물질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라고 말했다. 고 해설사도 “육지 가서 오래 살다 온 분들이 와서는 ‘옛날에 매일 갔던 곳인데 왜 못 가요?’라고 궁금해한다”고 말했다.
자연의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 중이다. 제주 서귀포시 보목동 조간대(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갯녹음을 볼 수 있다. 갯녹음은 바닷물 속 탄산칼슘이 해저 바닥, 바위 등에 하얗게 달라붙는 현상을 말한다. 키 큰 녹조류가 자라지 못해 조간대 생물이 자취를 감춘 결과 발생한다. 하얀 바위들이 말하는 건 결국 ‘바다의 사막화’다. 구두미 포구에서 소라잡이 조업을 하던 고영순(65)씨는 “전부 갯녹음이다. 물질을 하다 보면 여름에 수온이 너무 뜨거운 게 몸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김지훈 이택현 정진영 이경원 기자 germa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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