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10년차, 이 공원을 잃고 싶지 않아요
[유지영 기자]
서울에 산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10년을 살면서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가게에 정을 붙이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나는 번번이 어기고 만다. 나는 "이 자리에는 원래 A 식당이 있었는데, 식당이 이전한 뒤에 B 카페가 들어왔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C 카페가 영업하고 있네"라며 그 장소의 이력을 줄줄 꿰고 다닌다. 물론 서울은 매일 무엇이든 생기고 사라지니까 이는 대단히 부질없는 짓이다. 그사이에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식당과 카페, 꽃집과 체육시설이 들어섰다 사라지고, 또 들어섰다 사라진다.
커피가 맛있어서 음악이 듣기 좋아서 몇 년 동안 즐겨 가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카페는 재개발로 인해 밀려나 쓸쓸히 사라졌다.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대단했는데. 나는 카페의 마지막 영업일에 방문해 눈물을 글썽였지만 건물이 철거되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대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멋대가리 없는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 건물은 한동안 오래 공실이 돼 비어 있었다. 나는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공실로 둘 거면 뭐 하러 건물을 다시 지은 거야, 라면서.
▲ 한때 혁신파크 내에 있던 비건카페 '달냥'에 불이 들어온 모습. 지금 '달냥'은 혜화동으로 이전을 해서 운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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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강아지 밤이와 혁신파크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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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의외의 소식은 아니었다. 서울혁신파크는 민주당 출신 시장의 유산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시장이 죽고 나서 정치권의 격전지가 됐고, 서울시장이 바뀌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용도 변경이 추진됐다.
서울혁신파크에 어느 대학 캠퍼스가 들어설 것이라고도 했다가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라고도 했다가 이제는 '산업, 주거, 문화 융복합도시'가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융복합도시에는 60층짜리 랜드마크 타워가 지어진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부지에 대형 복합 문화 쇼핑몰과 주거 및 업무 복합 단지를 2030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
그 사이 계약이 만료된 서울혁신파크 입주 단체들은 새로운 사무실을 찾아 은평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니 서울혁신파크 입주 단체 구성원들이 주로 이용하던 비건 카페는 손님을 계속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건 카페와도 언젠가 이별하겠다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렀다. 서울혁신파크는 2011년 문을 연 이래로 은평 구민들의 소중한 생활 공간이 돼주었다. 나의 강아지를 포함해 수백 마리의 강아지들에게 매일의 산책로가 돼주고, 러너들에게는 좋은 달리기 코스가 돼주면서, 장애인들을 위한 치과가 마련돼 있고, 구석구석 조명이 밝게 돼 있어 여성들이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생활공간이 돼준다.
여러 시민이 모여 은평구에 서울혁신파크의 용도 변경에 대해 문의해 봤지만 은평구에서는 서울혁신파크가 서울시의 부지이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그 말이 나는 무척이나 의아하다. 은평구민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서울혁신파크의 용도 변경에 은평구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누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까. 또한 서울시에서는 서울혁신파크의 용도 변경을 고려하면서 한 번이라도 은평구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는 없었던 걸까.
내가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만난 많은 은평구민은 서울혁신파크의 용도 변경을 우려하고 은평구 밖으로의 이사를 고려하고 있다. 현재 서울혁신파크에 남은 몇 되지 않은 입주단체들이 모인 서울혁신파크 개발 반대위원회에서는 '서울혁신파크 개발을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서명을 받고 있다. 26일 현재 서명이 1900명을 넘어섰지만 목표는 30만 명이라니 아직 턱없이 모자란 수치다.
▲ 혁신파크에 있는 아름다운 목련나무. 재개발이 되고 나면 이 목련나무는 어디로 사라지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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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에서 가장 큰 공원인 서울혁신파크를 없애면 100년 뒤 서울은 지금보다 더 나쁜 도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공원'은 랜드마크가 될 수 없고 오로지 60층짜리 '건물'만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이 공원을 잃고 싶지 않다. 이 장소를 잃고 싶지 않다. 서울살이는 매 순간 소중한 장소가 없어지는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상실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습관처럼 배어 있을 것이리라. 한 번쯤 소중한 공간을 잃고 체념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울혁신파크의 개발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물론 서명운동만으로 이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민들의 중지를 모으는 일이 공원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첫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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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면서 서울혁신파크에 2020년 심은 나무. 지금 이 나무는 있지만 팻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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