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묻히기를 소원한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단칼에 끝내는 서울 산책기]

이상헌 2023. 4. 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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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부터 마포새빛문화숲까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기분전환 할 수 있는 서울 산책로를 소개합니다. 3년에 걸친 발품 끝에 덜 알려진 장소를 전 국민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이상헌 기자]

한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밤섬 건너편 합정동에는 공교롭게도 한 뿌리를 가진 종교 성지가 이웃하고 있다. 천주교절두산순교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자리한다. 바로 옆 당인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한국중부발전(KOMIPO) 부지를 새롭게 꾸민 마포새빛문화숲이 있다.

이번 산책코스는 양화진역사공원을 둘러보고 절두산을 거쳐 마포새빛문화숲을 구경하는 루트다. 절두산에서는 당산철교를 배경으로 사시사철 붉은 노을을 감상할 수 있으며, 당인동에서는 코미포 에너지움 체험관을 통해 우리나라 발전 역사를 체험할 수 있으므로 아이들과 견학하기에 좋다.
 
▲ 양화진-절두산-코미포 산책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절두산순교성지, 마포새빛문화숲 산책길.
ⓒ 이상헌
산책의 시작은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양화대교 방면으로 진행하면 된다. 전철 옆길을 따라 양화지하차도를 건너면 양화진역사공원으로 올라 선교사 묘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묘석과 안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고국 보다는 이역만리 대한민국에 묻히기를 소원한 이들이다.

언더우드 가문 3대가 안장되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호러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Horace Grant Underwood)는 미국인 선교사로서 오늘날 우리나라 개신교 장로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정동에서 가옥 한 채를 빌려 고아들을 가르쳤으며 이 시설이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오늘날의 연세대가 된다. 조선 독립을 위해 공헌한 그를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으며 이곳에 뼈를 묻었다.
 
▲ 언더우드가 묘비. 언더우드 가문 3대가 안장되어 있다.
ⓒ 이상헌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은 3.1운동과 제암리 사건을 널리 알리다가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루고 강제추방 당하지만, 해방 후 통역관 자격으로 귀국하여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다. 세 명의 아들(원일한, 원재한, 원득한)은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원일한(Horace Grant Underwood Jr.)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 역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했다가 복권되어 영원한 한국인으로 남았다.

원일한의 장남인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Jr.)은 연세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길러내는데 힘을 쓰다가 2005년 귀국하여 한국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동생인 원한석(Peter F. Underwood)은 대한민국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으며 2021년에는 연세대 홈페이지와 박물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있다.

조선 독립과 한글 대중화에 헌신하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선교사이자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다수의 논문과 영문 잡지 기사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과 배재학당,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한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 호머 헐버트 묘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한제국 특사로 활약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 이상헌
배재학당 출신인 서재필, 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글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도입했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자문 역할을 맡아 서방 국가를 향한 외교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특사로 임명되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끌어낸 장본인 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리고자 한다. 고종의 친서를 갖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추방당한다.

광복후 1947년 이승만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대한민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폐렴을 얻어 별세하면서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은 그의 아들 셸던(Sheldon Hulbert)도 같이 묻혀있다. 그의 묘비는 1949년에 세워졌고 이승만이 묘비명을 쓰기로 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50년이나 지난 1999년 헐버트 박사 50주기 추모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채워진다.
 
▲ 백년 전 일이라구요? 대한민국에 묻히기를 소원한 이들입니다 ⓒ 이상헌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다

독일 귀족으로 대한제국 육군 군악대를 창설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한국명 예계로)는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역시 3대에 걸쳐 한민족을 위해 봉사한 가문이다. 프란츠는 프로이센 왕립악단 단장으로 일하던 중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도착했다.

헐버트가 창간한 영어 잡지 코리아 리뷰 2월호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서도 20년간 활약한 바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의 공헌으로 한국인의 음악 재능과 합쳐 훌륭한 시위군악대가 만들어질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는 기사를 냈다. 그는 대한제국 양악대를 창설하고 탑골공원에서 정기공연을 하며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다.

고종 황제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경운궁에서 군악대 연주가 열렸으며 외교 사절들의 극찬을 받으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씨앗을 뿌렸다. 안타깝게도 대한제국 애국가는 을사늑약으로 금지되었고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지금도 우리나라 국민이 부르고 있다.
 
▲ 프란츠 에케르트 묘비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 이상헌
고종으로부터 '태극3등급훈장'을 수여 받은 그는 후진 양성에 힘을 쓰다가 위암으로 별세한다. 큰 딸 아말리(Amalie Eckert)는 서울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에밀 마르텔(Emile Martel)과 결혼하여 딸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Martel)를 낳았다. 광복 후 에밀은 대한민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아말리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손녀 딸 마리는 한국으로 돌아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녀로 살면서 한민족을 위해 봉사했다. 이곳 양화진 묘역에는 예게로와 에밀, 마리가 함께 잠들어 있다.

그의 첫 제자였던 백우용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경성음악대'를 조직하여 정기연주를 이어갔으며 이는 훗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된다. 2022년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은 대한제국 애국가 제정 120주년 기념공연을 에케르트의 조국 독일에서 초연했다.

천주교인의 머리를 자른 순교성지

'천주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톨릭의 교리는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자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념이었다.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한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양화진까지 올라와 통상수교를 압박하자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 당산철교 노을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에 분노하여 천주교인들의 목을 베어 절두산이라 한다.
ⓒ 이상헌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파괴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재를 약탈하는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이때 훔쳐간 외규장각도서(조선왕조의궤)는 145년이 지난 2011년에 반환되었지만 명목상 소유권은 아직도 프랑스가 가지고 있다. 병인양요에 분노한 대원군은 양화진 바로 옆의 잠두봉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참수한다.

이후 잠두봉은 '머리를 자른 산'이라는 의미로 절두산이 되었고 100년 지난 후 천주교순교성지로 거듭난다. 이곳 박물관에서 그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며 성당에서는 여전히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절두산에서 당산철교를 바라보면 그날의 핏빛 하늘처럼 붉은 노을이 진다. 순교성지를 나와 한강변을 타고 잠시 걷다보면 마포새빛문화숲 한켠에 있는 코미포(한국중부발전) 안의 에너지움을 견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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