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의 V토크] 핀란드에서 온 배구에 미친 사람, 토미
"배구에 미친 사람이요? 긍정적인 의미라면 동의합니다."'
취미도 배구, 특기도 배구, 관심사도 오로지 배구. 남자배구 대한항공을 정상에 올린 토미 틸리카이넨(36) 감독 이야기다. 호수와 얼음, 산타의 나라 핀란드에서 온 젊은 감독은 어떻게 한국 최고의 팀을 이끌었을까. 경기도 용인 대한항공 체육관에서 만나 물었다.
대한항공의 지난 시즌은 완벽했다. 컵대회에서 우승했고,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도 3연승으로 우승했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트레블을 달성했고, 3년 연속 통합우승을 거머쥐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경기 뒤 "고맙습니다"란 한국어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경기장 안에서 만나는 틸리카이넨 감독은 '재미없는 사람'이다. 선수들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취재진의 질문에도 다소 딱딱한 답변을 내놓는다. 경기 중엔 열정적으로 지시를 하거나, 제스처를 하지만 냉철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틸리카이넨 감독 스스로도 "그렇다. 경기장에선 '게임 모드'가 된다"고 했다.
유일한 취미는 숙소 앞 호수를 달리는 거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나만의 온전한 시간이다. 생각도 정리하고, 건강에도 좋다. 달리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고, 휴대폰에 메모를 해둔다"고 했다. 이어 "핀란드엔 집집마다 사우나가 있다. 핀란드였다면 사우나를 매일 했을 것이다. 여가 시간엔 항상 아내와 함께 한다. 부산 여행을 가기도 했다. 핀란드의 부모님, 친지와 영상통화를 하는 걸 제외하면 항상 배구를 보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하지만 우승 직후 만난 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한껏 흥분된 얼굴로 선수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소주병을 들고 관계자들에게 직접 술을 따르고, 잔을 부딪혔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그 쪽이 진짜 성격에 가깝다"고 웃으며 "핀란드도 한국과 비슷한 문화다. 약간은 다르지만 (떠들썩하게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점이)비슷하다"고 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의 경력은 특이하다. 25세 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핀란드 코콜라 타이거즈를 맡아 3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독일을 거쳐 일본 울프독스 나고야 수석코치와 감독을 지냈다. 아직 30대인데 벌써 우승 5회, 준우승 2회(리그 기준)를 차지했다.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아픔도 겪었다. 청소년 대표로 뽑힐 만큼 실력이 뛰어났지만, 18살 때 허리 부상으로 은퇴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뒷마당에서 6살 때부터 아버지와 배구를 했다. 부모님이 체육교사여서 아이스하키, 축구도 해봤는데 늘 배구가 첫 번째였다. 프로팀 입단 제안이 왔는데 내 몸이 견디지 못해 끝내 사인을 하지 못했고, 슬펐다. 핀란드도 군복무를 하는데, 2주 만에 아프다고 쫓겨났다"고 떠올렸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배구인생이 끝난 유망주의 슬픔은 컸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3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클럽에서 일한 적도 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다 배구계로 돌아왔고, 선수 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에너지를 지도자로서 발휘하려 했다. 많은 길을 돌아왔고, 어두운 시기지만 그런 시간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듯하다"고 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2년 전 대한항공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한국에 몇 번 온 적이 있다. 전지훈련으로도 왔고, 아내와 개인적으로 휴가차 짧게 오기도 했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도 있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매운 음식, 그리고 한국인의 정에 대한 이미지가 강했다"고 했다. 이어 "무조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부터 한국 배구 산업에 대해 흥미가 있었다. 내 아이디어를 주고, 나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한항공엔 틸리카이넨 감독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이 있다. 주장 한선수, 그리고 동갑내기 유광우다. 둘은 코트 위의 야전사령관인 세터다. 배구에 대한 생각, 훈련 방식, 그리고 팀을 바라보는 눈에서 차이가 없는 게 이상했다. 연장자를 우대하는 한국 문화도 적응해야 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특별하지 않고,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어느 팀에 가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가 있었다. 한국이 나이를 따지는 '형' 문화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두 시즌을 치르면서 한선수와 틸리카이넨 감독은 최선의 방법을 찾아나갔고, 해피엔딩으로 이어졌다.
외국인 감독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역시 의사 소통이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아시아로 오면서 제일 힘든 부분이다. 통역을 거쳐서 이야기는 하지만 1대1 대화는 힘들다. 통역을 거치면 어떤 어휘, 단어를 쓰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급박한 상황에서 실수가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겼다. "그는 일본, 한국에서 지내는 6년간 안테나를 좀 더 세웠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유럽에 있을 때보다 더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선수들도 더 잘 이해했다. 물론 선수들도 영어를 더 쓰려고 노력했다"며 선수들의 노력에 고마워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건 '창의성'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틀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길 권한다. 다음 달 바레인에서 열리는 아시아 클럽 선수권에 출전하는 것도 그런 경험을 쌓아가기 위해서다. 아시아 챔피언들이 출전하는 이 대회에 한국 팀이 나서는 건 2005년 프로화 이후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우승한 건 2001년 삼성화재다. V리그 휴식기에 열려 대다수 팀들이 포기했지만, 대한항공은 출전하기로 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항상 선수들에게 '넥스트 레벨'을 생각하라고 한다. 클럽 선수권에 나가는 것도 '다른 리그의 경험'을 안겨주고 싶어서다. 나도 그랬지만, 다른 리그와 다른 배구를 보면서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을 가지길 바랐다. 그래야 한 걸음, 한 걸음 한국 배구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용인=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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