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야, 채혈!"이라고 부르는 환자

류옥하다 2023. 4. 26. 11: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성 의사들이 겪는 차별... 평등한 의료 환경, 나아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을 쓴 류옥하다 기자는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류옥하다 기자]

"야, 채혈! 똑바로 안 하냐?"

새벽 4시, 병실로 피를 뽑으러 들어간 동료에게 환자가 소리쳤다. 의사 면허를 받고 병원 근무를 시작한 첫날의 일이었다. 단지 피 두 방울을 침대에 흘렸을 뿐인데 그는 의사로도, 이름으로도 아닌 '채혈'이라는 단어로 불렸다.
 
 동료는 환자에게 의사로도, 이름으로도 아닌 '채혈'이라는 단어로 불렸다.
ⓒ elements.envato
 
두 달이 지났다. 주위에서 간간이 환자에게 폭언을 듣거나 폭행을 경험한 동료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는 '의사 선생님' 존칭을 붙이며 친절과 존중을 보여주었다.

평온하던 어느 날, 문득 두 달 전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의문이 들었다. 그날 바로 옆에서 폭언을 당한 동료는 160cm 안팎의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그 환자는 과연 186cm-0.1톤 거구의 덩치인 내게도 '야, 채혈!'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생각보다 주위 여자 동료들에게 그런 무시와 모욕은 드물지 않았다. 가운을 입고 명찰을 패용해도 의사로 생각하지 않고 '의사 불러와!'나 '야!'라고 말하거나, 치료 잘하는 남자 선생을 불러오라고도 한단다.

이러한 일이 내 주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 땅에서 여성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에 궁금함이 생겼다. 

이 땅에서 여성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

환자들의 태도만이 차별의 전부가 아니었다. 여성 의사들은 면허를 받은 후 세부 전공을 정하는 과정부터 벽이 존재했다. 소위 인기과들, 혹은 수술과에서 힘이나 능력, 학업 능력과 별개로 선발에 성별의 제한을 둔다.

2021년 대한의학회 저널에는 국내 의사들을 대상으로 성차별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가 게재됐다. 모든 항목에서 여성 전문의들의 차별 경험 비율이 높았다.

여성 전문의 80%가량이 환자들에게 차별을 겪거나 예의 없는 태도를 경험했고, 63%가량은 의학 실력의 평가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55%는 심지어 간호사를 포함한 다른 의료진으로부터 남성 전문의와는 다른 대우를 경험했다고 한다.

절반 가량이 사교 모임, 네트워크에서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88%는 보직에 임명되는데 차별을 받고 있었다. 임상 강사나 교수가 된 이후에 승진에서도 79%가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경력, 세부 전공, 직급 등의 요인을 조정해도 이런 차별은 여전했다. 모든 항목에서 나이와 상관 없이 여성 전문의가 성차별을 경험할 확률이 3.4배 높았다(Choi J et al. Experiences and Perceptions of Gender Discrimination and Equality among Korean Surgeons, JKMS).

평등한 의료 환경을 위한 노력
 
 바로 옆에서 폭언을 당한 동료는 160cm 안팎의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 의사였다. 환자는 과연 186cm에 0.1톤의 덩치를 가진 내게도 '야 채혈'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 pixbay
 
이러한 편견과 차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겠다. 먼저 성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어쩌면 식상한 말이지만, 가장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여성 의사들의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확립하려는 적극적인 캠페인이 필요하다.

의료 환경에서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차별 인식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성별을 넘어 인종과 국적, 성적 지향, 문화와 종교를 넘어 차이를 존중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돕는 일도 중요하겠다.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하고, 수술과 등의 전공에 진입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병원과 분과들도 부담 없이 여성을 선발할 수 있다.

법,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그것이 잘 작동하도록 감시하는 일도 필요하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별에 따른 격차, 임금 차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당장의 입안이 무리라면 불평등을 먼저 바로잡는 병원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더하여 여성 의료인 스스로 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평등을 외칠 때 선별적 정의처럼 선별적 평등을 말하는 우를 범하고는 한다. 혹시 여성 의료인도 그런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여성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성별 고정관념을 택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 자신이 불평등의 공범자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뉴욕타임스의 파멜라 폴의 칼럼 <여전히 여성들은 '인형의 집'에 갇혀 있다>)

예컨대 수련 과정에서 남성보다 쉬운 파트를 배정받는다거나 힘 쓰는 일에서 여성이 제외되는 관성에 대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불평등의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왜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남성 의사로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가르치려 드는 전형적인 남성의 모습(Mansplain)'이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차별과 폭력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수많은 방관자가 존재한다. 되려 제삼자의 시선이 당사자의 말보다 객관성과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동료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 글을 쓸 수 있었다.

심지어 전문직이라 불리는 의사들이 이럴진대, 다른 직군은 오죽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단지 의료인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직군과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차별 개선이 있어야 하겠다.

편견 없는 의료 환경을 위한 노력은 단지 여성만을 위한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 삶의 어느 지점이나 어떤 집단에서 차별을 겪기 마련이다. 결국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인 것이다.

차별 없는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신뢰와 포용력을 높인다. 그렇게 쌓인 사회적 자본은 구성원의 행복과 만족에 더해 모두에게 경제적인 이익으로도 돌아온다. 평등한 사회가 생산성이 더 높고, 성장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매켄지 글로벌연구소, '평등의 힘' 보고서; How advancing women's equality can add $12 trillion to global growth - McKinsey global institute).

다음 세대는 진정으로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신분,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 그 날을 위해 모두의 관심과 힘이 절실하다.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면 언젠가는 그런 땅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