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하지만 나는 아니지

이경원 2023. 4. 26.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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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니지(But, not me)."

이달 70세를 맞아 정년 퇴임한 전직 미국 대법관과의 화상 인터뷰는 그 대목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자신이 남긴 기후위기 소송 판례와 관련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비상사태가 더욱 빨리 악화될 것"이라고 설명하던 중이었다.

그는 "법원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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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이슈&탐사팀장


“하지만, 나는 아니지(But, not me).”

이달 70세를 맞아 정년 퇴임한 전직 미국 대법관과의 화상 인터뷰는 그 대목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기자와 눈을 맞추려는 듯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남긴 기후위기 소송 판례와 관련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비상사태가 더욱 빨리 악화될 것”이라고 설명하던 중이었다. 화면 너머 기자를 ‘젊은 세대’라 부르며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앞으로 당신도 안전을 위협받을지 모른다”고 말한 때였다. 분명 인터뷰였지만 그는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이래서 내 세대가 더 빨리 행동할 의무가 있고, 또 판사들이 법정에서 빨리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거야.”

마이클 윌슨 전 미 하와이주 대법관은 지난달 하와이 대법원이 바이오매스 발전소 ‘후 호누아’의 사업 중단이 정당하다고 대법관 5인 전원일치로 판결할 때 홀로 보충의견을 남겼다. 생일이 4월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보충의견이 자신의 마지막 판결문인 걸 알았다. 지역에서나 이름을 아는 발전소의 판결이었지만 보충의견을 채운 건 최신 과학과 인권 보호의 역사였다. 법조계와 환경단체의 찬사에도 그는 “참신하지도 혁신적이지도 않은 글이다. 지구가 온난화하는 현실을 인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은퇴하는 판사의 39쪽 분량 보충의견에는 ‘미래세대’라는 말이 19번 등장한다. 더 빨리 행동할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채근했을까, 글은 마치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다. “미래세대가 거주 가능한 행성을 만들려면” “미래세대에게는 메마른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원이 미래세대를 보호할 헌법적 의무를 회피한다면”…. 마지막 ‘미래세대’는 판결문 마지막 쪽 결론에 나온다. “우리는 유일무이한 기후위기 비상사태에 처해 있다. 우리 아이들과 미래세대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평이한 문장이다. 현실을 인식했을 뿐 근엄한 훈계도 화려한 법리도 없다.

그는 보충의견에 로스쿨 학생들이 다 안다는 1954년 ‘브라운 대 교육부’ 판결을 인용했다. 미국이 백인과 흑인을 분리교육한 것을 차별로 인정한 판결이다. 한동안 당연시되던 잘못된 관행을 당시 사법부가 바로잡았던 것처럼 기후위기 문제에서도 제동을 걸겠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이해해도 좋겠지만, 기후위기 문제에서의 구제(remedy)는 그때보다 오히려 간단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모든 학교를 일일이 살펴 차별행위 인과관계를 입증하고 구제책을 마련하는 건 어쩌면 어려울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기후위기의 입증은 과학적으로 돼 있으며, 구제할 방법 역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으로써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는 “법원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 호누아’ 사건을 판결한 대법관들과의 인터뷰를 요청하자 하와이 사법부는 “현직 법관의 판결문 이외 발언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회신했었다. 윌슨 전 대법관에게 “하와이 사법부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임기가 2024년으로 적혀 있고, 인터뷰를 하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그는 “정년인 70세에 이르지 않았다면 분명 판사 일을 계속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판사에겐 인간에 대한 관심과 희망이 있어야 하며, 긴급한 판단을 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의”라고 했다. 그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 다시 판결문을 읽어보니 “연방법원은 ‘줄리아나 사건’ 등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책임을 포기했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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