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쪽잠, 연습만 한달’ 필리핀소녀 감동시킨 K-장로님이 그린 벽화
한국인에게 골프 여행지로 유명한 필리핀 클라크. 그곳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 팔라얀에 9명의 한국 남녀 선교팀이 도착한다. 1m50㎝ 높이의 긴 철제 작업대에 가뿐히 올라선 여성은 “다람쥐같지 않냐”며 깔깔거린다. 한 남성은 동행한 기자에게 “우리 목사님은 극J예요, J”라며 매사 계획적인 성격을 MBTI에 맞춰 설명했다. 영락없는 2030선교팀으로 착각할 법한 대화를 나눈 이들의 평균나이는 63세. 진동휘 장로는 “내가 55살로 막내이니 말 다 했다”며 웃었다.
대구제일감리교회(오성섭 담임목사)의 2023 필리핀 단기 선교팀이 지난 24일 가정폭력 등 피해 소녀의 보호소인 ‘홈포걸스’에서 벽화를 그리던 중 나온 장면이다. 같은 날 인근 타를라크에 위치한 소년 피해자 보호소인 ‘링압센터’에서 교회 외벽에 벽화 작업을 한 또 다른 ‘어르신’ 선교팀 9명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고인경 장로, 김명선 사모, 김명애 사모, 김명희 권사, 김영옥 권사, 남성숙 권사, 장예원 집사, 조위자 권사, 지영애 권사, 홍연정 집사, 박덕상 장로, 봉명훈 장로, 이동하 장로, 장영진 장로, 조귀호 권사, 진동휘 장로, 홍재호 장로가 이번 선교팀에 포함됐다. 장로 직분만 7명, 권사 직분도 6명이나 된다.
두 곳 보호소에는 대구제일감리교회가 코로나 시국에 ‘사랑워십센터’라는 이름으로 봉헌한 현지 교회가 있다. 필리핀 정부가 관리·감독하는 사회복지시설에 들어선 교회로 의미가 남다르다. 김현태 필리핀 선교사는 “대구제일감리교회가 두 곳 이전 타를라크에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인 아모르빌리지에 교회를 처음 세웠는데 이는 정부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에 다목적홀이 아닌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최초의 사례”라면서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보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복음을 전하는 효과가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선교팀은 25일과 26일 ‘링압센터’와 ‘홈포걸스’ 내 교회의 봉헌 예배에 참석했다.
이번 선교팀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참여자 모두가 고연령인 ‘실버세대’라는 데 있다. 이는 현지 복지시설의 요구 사항을 맞춰주려고 시기를 앞당겼기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단기 선교는 대학생 방학이 시작되면 학생과 함께 떠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두 보호소는 코로나로 미뤄진 교회 봉헌식과 시설 창립기념일에 맞춰 썰렁한 교회 외벽을 꾸며주길 바랐다. 25일은 ‘링압센터’의 창립 35주년 기념일이었다. 채리토 링압센터장은 “감리교단의 목사님이 주일마다 찾아와 우리와 함께 예배드린다”며 “몸과 마음의 상처가 있는 친구들이 한국교회 덕분에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돼 기쁘다”고 했다.
이번 선교팀이 선교지에서 보여준 체력은 2030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새벽 비행기 일정으로 현지 선교센터에 도착한 시간은 24일 새벽2시였지만, 선교팀 상당수는 동이 틀 때까지 흰색, 검은색, 빨간색 등 페인트 기본색으로 필요한 색을 만드는 조색 작업을 한 뒤 1~2시간만 눈을 붙였다. 이후 오전7시30분 예배를 드리고 차로 2시간을 달려가 사역지에 도착했다. 그러곤 점심시간 30분 정도를 제외하고 종일 벽화 작업에 매달렸다. 김 선교사는 “100팀 정도 선교팀과 사역했는데 근육통을 걱정해 파스를 가져온 팀은 처음 봤다”고 파안했다.
벽화 경험이 전혀없던 선교팀은 출발 한 달 전부터 교회 야외 공터에 가벽을 설치해 벽화를 연습했다. 토요일이나 주일에 모여 조색 작업부터 밑그림 본뜨기, 테두리 그리기, 채색, 바니시 칠까지 실전과 똑같이 벽화를 제작했다. 오 목사는 “페인트 가게 사장님이 전문가없이 벽화용 조색을 할 거라고 하니 불가능하다고 만류하시더라”며 “인터넷에 나온 대로 해봐도 페인트 농도에 따라 색이 천차만별로 나와서 스포이드로 페인트를 1㎖씩 늘려가면서 원하는 색을 만들었다”고 했다.
수많은 훈련 덕인지 선교팀은 벽 크기가 예상과 다르거나 밑그림 선이 비뚤어지는 등 현장에서 생긴 돌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에밀리따 ‘홈포걸스’ 원장은 “더운 볕에 지치지도 않고 일하는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감동했다”고 했다. ‘홈포걸스’에서 생활하는 10대 로즈양은 “어린이를 등에 업은 예수님 그림이 너무 맘에 든다”고 했다.
오 목사는 모든 성도가 사역하는 교회를 꿈꾼다고 했다. 그는 “우리 교인은 선교지에 직접 가는 선교사와 이들을 보내주는 선교사 둘로 나눌 수 있다”며 “저는 ‘이런 사역을 하니 도와주세요’라며 콕집어 누군가에게 사역을 부탁하지 않는다. 대신 광고 시간에 여러가지 선교에 대해서 최대한 재미있고 자세히 설명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이번 선교팀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빠짐없이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선교 핸드북에 적힌 명목상 역할이 아니고 진짜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는 사진과 영상을 찍었고 또 다른 이는 사역지 출발이나 사역지 활동 때 “5분 남았습니다”라며 소리치는 ‘타임키퍼’를 감당했다. 선교지를 오갈 때 빠진 물품은 없는지 확인하는 사람, 기도회나 특송을 담당한 이도 있었다. 오 목사는 영상·사진 기록 2진이다. 홍재호 장로는 “담임목사님을 따라 대다수의 교인도 계획형인 J가 되어간다”며 “모두가 선교의 주체가 되니 사역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구제일감리교회의 해외 사역 철칙은 현지 선교사 중심이라고 한다. 오 목사는 “우리는 현지 선교사님이 장기적으로 꾸준히 사역을 하는 데 필요한 일을 도와주러 가는 것이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대구제일감리교회가 2015년 필리핀 타를라크에 처음 봉헌한 롬보이교회에서 2년 뒤 연 ‘코리아 푸드 페스티벌’이나 장애인시설인 아모르빌리지에 식량자급자족을 위해 만든 양어장, 양계장, 돼지축사가 그 좋은 예다. 아모르빌리지의 로웨나 원장은 “한국교회의 세심한 사역으로 버림받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커가고 있다”며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한다”고 했다.
팔라얀·타를라크(필리핀)=신은정 기자 se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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