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불패… ‘피넛’ 한왕호 인터뷰 ②

윤민섭 2023. 4. 2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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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K 제공

젠지 ‘피넛’ 한왕호는 ‘LCK 우승청부사’로 불린다. 2016년 락스 타이거즈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 그는 이듬해 SK텔레콤 T1에서 두 번째 우승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2018년엔 킹존 드래곤X에서 또 한 번 소속팀에 별을 선물했다. 이후 젠지, LGD 게이밍, 농심 레드포스를 거치면서 슬럼프와 제2 전성기를 모두 경험했다.

2022년, 젠지에 재입단한 그는 서머 시즌에 팀의 숙원이었던 LCK 우승을 이뤄내며 우승청부사의 귀환을 알렸다. 그리고 올해 스프링 시즌, 그는 ‘룰러’ 박재혁의 이탈로 전력이 약화됐단 평을 받던 젠지를 또 한 번 리그 최정상에 올려놨다.

25일 서울 강남구 젠지 사옥에서 한왕호를 만나 인터뷰했다. 기사 1편에서는 박재혁과 ‘리헨즈’ 손시우의 공백을 신인 ‘페이즈’ 김수환과 브리온 출신 ‘딜라이트’ 유환중으로 메우고도 스프링 시즌을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2편에서는 2015년 시작한 한왕호의 프로게이머 여정을 되돌아봤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번 우승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결승전을 꼽는다면.
“상대 팀의 퍼포먼스, 메타, 팀원 간의 시너지 등을 고려해야 해서 순위를 매기기는 힘들다. 다만 가장 어려웠던 우승으론 2016년 서머 시즌을 꼽고 싶다. SK텔레콤 T1 시절 최병훈 감독님께서 ‘첫 결승전에서 이기는 것보다 처음 결승전에서 좌절한 다음 두 번째 결승전에서 이기는 게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던 게 인상 깊었다. 나는 커리어 첫 결승전에서 T1에 졌다. 같은 해 서머 시즌에 KT 상대로 이겨서 첫 우승에 성공했다. 아마 그 기회를 놓쳤다면 순탄치 못한 커리어를 쌓았을 것 같다. ‘나는 우승해본 선수’라고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게 중요하더라.”

-가장 까다로웠던 결승 상대를 꼽는다면.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풀 세트 접전을 치렀던 2016년 서머 시즌 결승전이고…그다음은 올해 스프링 시즌이다. 그외 결승전에서는 전부 크게 이겼다. 사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2016년의 KT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대신 T1을 이기고 올라왔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기억난다. 멤버 변화를 떠나 그때도, 지금도 T1이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가보다.”

-한 선수는 소위 ‘4대 미드’로 불리는 이들 중 ‘쇼메이커’ 허수를 제외한 3인과 한솥밥을 먹어봤고, 우승도 해봤다. ‘페이커’ 이상혁, ‘비디디’ 곽보성, ‘쵸비’ 정지훈…모두 개성이 뚜렷한 선수들인데, 이들에 대한 한 선수의 생각이 궁금하다.
“하하. 미드라이너에 대한 평가는 ‘노 코멘트’ 하겠다. 분명한 건 ‘쿠로’ (이)서행이 형까지 포함해 네 명의 미드라이너가 전부 당해 최고 수준의 선수였다. 거기에 나 또한 잘해서 우승했다고 생각한다. 미드라이너들과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관계라고 본다.
상혁이 형은 특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농심 시절 다시 우승을 향한 열망이 생겼다. 나와 오래전에 함께 우승했던 상혁이 형, ‘칸’ (김)동하 형이 여전히 결승 무대를 밟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다시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
2018년 스프링 시즌에 아프리카 프릭스를 잡고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런데 우승의 기쁨이 예전처럼 길게 가지 않더라. 그해 나는 게임을 이겨도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안도감만 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생각이 강해져서 나를 갉아먹었다. 이후 한동안 우승과 멀어졌다.”

-결국 작년 서머 시즌에 그토록 고대했던 우승을 맛봤는데.
“2018년보다는 훨씬 기뻤지만 첫 우승보다는 감동이 덜했다. 우승 직후 시상식을 준비하면서 팀원들한테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쉽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결승전에서 3대 0으로 이기기도 했고, (결승전 전에) 우승할 거로 확신했던 시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히려 준우승에 그쳤던 스프링 시즌에 더 감정이 요동쳤다. 나는 눈물이 없는 편이다. 슬퍼도 남들 앞에선 울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스프링 시즌 결승전 직후에는 너무 속상해서 거의 오열하다시피 했다. 눈물을 다 쏟아낸 뒤에 ‘난 말로만 우승하고 싶은 게 아니구나. 진심으로 여전히 우승을 갈망하는구나’하고 느꼈다.”

-그렇다면 이번 스프링 시즌 우승 후엔 어땠나.
“이번 우승이 지난해 서머 시즌보다 더 행복했다. 대부분이 젠지의 우승을 예상 못 했으니까. 사실 나도 제삼자로서 커피 내기를 한다면 T1의 우승에 걸었을 것이다. 그런 세간의 기대를 뒤엎고 우승을 해서 더 기뻤다. 불리했던 4세트를 역전승한 것도 기분이 좋았다.”

-이번엔 세간의 기대를 받으며, MSI에 나간다. 우승할 수 있다고 보나.
“우선 나는 젠지가 기대를 많이 받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직전 시즌을 우승했지만 여전히 T1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적잖다. 우승 직후 시상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T1과 같은 패치 버전으로 다시 붙으면 이길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당장 젠지가 기대를 많이 받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생각한다. 난 최선을 다하되 차분한 마음으로 대회에 임할 것이다. 후배 선수들도 마음 편하게, 과도한 긴장 없이 대회를 치렀으면 한다. ‘LCK 스프링 시즌 우승팀의 위용을 반드시 보여줘야 해’라는 압박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 우린 말도 안 되는 우승을 해냈고, 그걸 한 번 더 해내기만 하면 된다.
원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서…나는 젠지가 충분히 MSI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젠지는 스프링 시즌 개막 전에 스크림 성적이 정말 나빴다. 그때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렸고, 기어코 우승을 이뤄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서 대회에 참가한다. 우승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앞서 두 차례 MSI에 참여해봤다. 한 선수만의 이 대회 노하우가 있을까.
“올해부터 리그별 출전팀의 수와 대회 포맷이 많이 바뀌었다. 적응력이 성패를 가를 것 같다. 나는 2018년 MSI를 치르면서 ‘절대 에어컨을 틀고 자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결승전 전날 분명 에어컨을 끄고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 이상하게 에어컨이 켜져 있더라. 결국 감기에 걸렸다. 경기 중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더라. 외부 요인 때문에 중요한 경기에 집중 못 한 게 너무 억울했다. 그해 이후로 나는 절대 에어컨을 틀고 자지 않는다.”

-큰 경기에서 패배한 뒤 인터뷰 석상에서 ‘선수단 컨디션 관리 실패’를 패인으로 꼽는 팀이 종종 나온다. 모두가 중요한 경기임을 알고 있고, 그만큼 평소보다 컨디션 관리에 힘쓸 텐데도 매번 실패하는 팀이나 선수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선수가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는 데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평소에 체력 관리를 하지 않아서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극도로 긴장하게 되면 제 기량이 안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2016년 롤드컵 결승전에서 5세트까지 치르게 되자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고갈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그해 서머 시즌 LCK 결승전을 5세트까지 치르고 온 건데도 매번 결승전만큼 관중이 들어차는 롤드컵 무대는 또 중압감이 다르더라. 그래서 이듬해부턴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지난해 코로나19 유행처럼 운의 영역이 선수의 컨디션 조절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다. 세 번째는 컨디션 관리를 꾸준히 잘 해왔지만, 긴장이나 부담감이 너무 심해서 선수가 전날 잠을 설치는 경우다.”

-한 선수는 베테랑이다. 부담감이나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인가.
“선수 경력이 길어지면 긴장을 덜 하게 되긴 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가령 팬들이 환호성을 보내주는 결승전 입장 순간, 익숙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라이엇 게임즈의 주먹 로고가 뜨는 순간, 팬들 앞에서 양 팀 선수들이 나란히 도열한 순간엔 반드시 긴장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번에 KT전을 앞두고 수환이가 다른 팀원들한테 ‘긴장하지 않는 법’을 묻더라. 나는 ‘어차피 첫 경기 초반엔 무조건 긴장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 킬을 따냈을 때, 라이너라면 첫 귀환을 할 때, 나는 첫 정글링을 마쳤을 때 긴장이 풀린다’고 얘기해줬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것들은 경험의 힘이다.”

-비슷하게 ‘더샤이’ 강승록이 2020년 롤드컵 4강전 객원 해설로 참여했을 때 제이스 대 오공 구도에서 제이스 쪽이 고전하자 ‘제이스가 압박을 못 한다. 첫 판에는 손이 꼬인다. 그래서 오공이 좋다(유리하다)’고 말했던 게 인상 깊었다. 선수만이 가질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는 듯하다.
“선수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첫 경기와 관련한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국제 대회에 가면 늘 경기장이 너무 춥다고 느낀다. 몸은 옷을 두껍게 입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데 손이 차가워지는 건 막을 방도가 없다. 핫팩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손에 열이 많은 선수들은 선풍기를 곁에 두듯 나는 미니 히터를 두는 걸 고민 중이다. ‘더샤이’ 선수도 본인이 경기를 치르며 체득해낸 노하우일 것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예비엔트리로 선정됐다. 태극마크에 대한 욕심은 여전한가.
“작년이나 지금이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2018년에도 대표팀의 전화를 받자마자 ‘(고)동빈이 형이 가든, 안 가든 무조건 참가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올해는 그때보다 더 큰 명예가 걸려있지 않나. 예나 지금이나 영광스러운 자리다. 국가대표로 뽑혀서 내가 지난 5년간 잘해왔다는 사실도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얘기를 이어나가는 건 불편하다. 아시안게임 사령탑이 김정균 감독님으로 확정됐다. 인터뷰로 왈가왈부해서 감독님께 선수선발과 관련한 그 어떤 부담감도 안겨드리고 싶지가 않다. 단지 ‘나가고 싶다’ ‘내가 잘하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인터뷰를 여기서 마무리하겠다. 끝으로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은퇴 시기를 묻는 분들이 적지 않다. 나는 입대하기 전까지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다. 아마 28~29세가 마지노선이 될 텐데, 그때도 내가 잘한다면 계속 유니폼을 입고 있을 것이다. 응원해주신 팬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여러분 덕분이다. 나 혼자였다면 힘들고 지쳐서 진작에 그만뒀을 것이다. 팬분들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에 계속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다. 이제 해온 날보다 해나갈 날이 적다.(웃음) 염치없지만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셨으면 좋겠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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