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불패… ‘피넛’ 한왕호 인터뷰 ①

윤민섭 2023. 4. 2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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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K 제공

젠지 ‘피넛’ 한왕호는 ‘LCK 우승청부사’로 불린다. 2016년 락스 타이거즈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 그는 이듬해 SK텔레콤 T1에서 두 번째 우승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2018년엔 킹존 드래곤X에서 또 한 번 소속팀에 별을 선물했다. 이후 젠지, LGD 게이밍, 농심 레드포스를 거치면서 슬럼프와 제2 전성기를 모두 경험했다.

2022년, 젠지에 재입단한 그는 서머 시즌에 팀의 숙원이었던 LCK 우승을 이뤄내며 우승청부사의 귀환을 알렸다. 그리고 올해 스프링 시즌, 그는 ‘룰러’ 박재혁의 이탈로 전력이 약화됐단 평을 받던 젠지를 또 한 번 리그 최정상에 올려놨다.

25일 서울 강남구 젠지 사옥에서 한왕호를 만나 인터뷰했다. 기사 1편에서는 박재혁과 ‘리헨즈’ 손시우의 공백을 신인 ‘페이즈’ 김수환과 브리온 출신 ‘딜라이트’ 유환중으로 메우고도 스프링 시즌을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2편에서는 2015년 시작한 한왕호의 프로게이머 여정을 되돌아봤다.

-스프링 시즌 우승 후 약 3주가 지났다. 세간의 저평가를 뒤엎고 우승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나.
“최근 일본 여행을 갔다. 현지 팬들과 여행객들한테 축하를 많이 받았다. 그때 실감 나더라.”

-시즌 개막 전 젠지의 우승을 예견한 이가 거의 없었다. 한 선수는 젠지의 우승을 예상했나.
“시즌 개막 전 인터뷰에서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망한 건 맞지만, 나는 또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바로 성적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우승을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박재혁과 손시우가 떠난 젠지를 우승권 전력으로 분류했던 이유가 있나.
“두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는 탑라이너 ‘도란’ 최현준과 미드라이너 ‘정지훈’의 존재다. 상체 경쟁력이 여전할 거로 봤다. 두 번째는 내 능력과 바텀 듀오의 성장 가능성이다. 나는 농심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해봤다. 어린 선수들이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을 내 능력으로 벌 자신이 있었다. 만약 바텀 듀오가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면 우승을 못 했겠지만, 그 둘이 해내지 않았나. 그래서 우승했다.”

-시즌 초반엔 상체가 바텀 듀오의 성장 시간을 벌어주는 게임을 젠지가 한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시즌 중후반부에 돌입하자 기량이 올라온 바텀이 주도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간다고 봤다. 실제로 젠지는 이 같은 게임 플랜을 짜고 따랐나.
“시즌 초반엔 상체 게임을 할 때 성적이 더 잘 나왔다. 실제로 우리는 작년보다 올 시즌 초반 전령 획득률이 높을 것이다. 시즌 중반부쯤 접어들면서 바텀 구도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탑에서 이득을 봐도 상대 역시 바텀에서 이득을 보면 수지타산이 안 맞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플랜이) 바뀐 것도 있다. 시즌 후반부에는 원거리 서포터가 너프를 당하고, 자야·아펠리오스·징크스 등의 티어가 오르면서 우리 팀에 날개가 달렸다.”

-바텀 1티어 픽이 루나미나 제리·룰루에서 자야, 아펠리오스로 바뀐 게 호재로 작용했다고 보나.
“루나미는 정교하고, 과감하고, 스노우볼을 잘 굴릴 수 있어야 빛이 나는 조합이다. 정규 리그 1라운드 기준으로 T1과 우리 바텀 듀오 중 어느 쪽이 더 루나미를 잘 다뤘을까. 단연 T1 바텀 듀오일 것이다. 그런 조합들의 티어가 내려간 게 우리로선 호재였다. 하지만 루나미를 비롯한 시즌 초의 메타 챔피언들이 다시 등장해도 이제는 우리 바텀 듀오가 부족함 없이 잘 다룰 거라 생각한다.”

-바텀 듀오의 성장이 우승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언제 선수들이 충분히 성장했다고 느꼈나.
“정규 리그 2라운드에 접어들고 한두 경기를 마쳤을 때, 선수들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수환이는 1라운드부터 기량이 느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다. 수환이가 워낙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환중이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느껴졌는데, 환중이도 2라운드에 들어서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한화생명과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경기에서 내가 장로 드래곤을 천천히 사냥한 적이 있다. 내가 그 플레이를 콜하자마자 환중이도 같은 의견을 제시하더라. 환중이와 나의 게임 보는 눈이 비로소 비슷해졌음을 직감했다.”

LCK 제공


-이달 1일 T1과 플레이오프 3라운드에서 붙었다. 그땐 젠지가 1대 3으로 졌다. 약 일주일 만인 9일 결승전에서 다시 붙었는데 이번엔 젠지가 3대 1로 이겼다. 어떤 묘수를 뒀길래 이처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인가.
“픽을 더 정교하게 준비한 게 좋은 성과로 이어졌다. 우리는 플레이오프 시작을 앞두고 자르반 4세, 올라프, 판테온 등 몇 가지 챔피언을 준비했다. 이런 조커 픽으로 게임을 이기면 다전제에서 유의미한 득점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조커 픽이 먹히지 않았고, 그래서 T1에 졌다. 그런 픽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더 좋은 픽들을 찾기 시작해서 결과를 바꿨다.
나는 일주일 만에 팀의 기량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승전 준비 과정에서 스크림을 잡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 좋았다. T1, KT와 스크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원상연 코치님이 LPL 쪽 인맥을 이용해 꾸준히 스크림을 잡아주셨다. 그때 한 스크림의 질이 꽤 좋았다고 생각한다. 또 T1보다 하루 먼저 잠실 경기장을 체험해본 것도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LPL과의 스크림을 두고 ‘질이 좋았다’고 평가한 이유는.
“특정 조합을 고르면 초반에 불리한 구도가 형성되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골라도 되겠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유리한 조합을 골랐을 땐 ‘확실히 유리하구나’하고 확신을 얻었다. LCK에서는 우리를 제외하곤 거의 마오카이를 하지 않았다. LPL 팀들은 하더라. 스크림을 통해 챔피언의 장단점을 배웠다. 내가 직접 해보는 것과 상대해보는 것으로부터 얻는 바가 또 다르다.”

-시즌 내내 젠지의 밴픽이 화제였다. ‘GDB 밴픽’이 비판도, 칭찬도 많이 들었다.
“상대방의 넥서스를 파괴하는 방법이 팀마다 다르다. 정규 리그를 18경기씩 치르다 보면 소위 ‘나쁜 밴픽’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 다만 빈도의 높고 낮음으로 밴픽을 잘한다와 못한다를 나누는 것인데, 나는 올해 젠지 밴픽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긴 경기를 돌이켜 보면 좋은 밴픽도 많았다. 나도, 코치진도 프로게이머로 생활해온 기간이 길다. 그 정도 비판에 대한 내성은 충분히 있다.”

-젠지가 메타의 흐름을 잘 읽고, 후반에 강한 ‘고밸류 픽’을 골라서 우승했다는 평가도 있던데.
“후반에 좋은 챔피언은 선수들이 게임을 길게 끌고 가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젠지가 결승전에서 유난히 고밸류 픽들을 골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조합의 이음새 역할을 하는 챔피언도 있었고, 중후반에 좋은 챔피언도 있었다. 다만 작년부터 느낀 바로는, 우리가 고밸류 조합을 잘 다루는 건 맞고 그게 젠지의 장점이기도 하다. 선수단의 체급도 뛰어나지만 나는 그보다 운영이 좋아서라고 생각한다.”

-한 선수 합류 이후 젠지 팬들의 ‘매끄러운 운영’에 대한 갈증이 많이 해소된 듯하다.
“나는 베테랑 형들과 함께했던 2016년부터 팀 운영에 많이 관여했다. 그해 게임은 역대급 ‘정글 메타’였다. 형들의 지시를 따르기만 해서는 낼 수 있는 퍼포먼스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주도적으로 의견을 제시했고, 형들도 내 생각을 최대한 들어주려 했다. 나는 정글러란 포지션이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0년 LPL에 가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플레이를 되새겼다. 내가 2016년에 좋아했던 플레이인데, 이후 점차적으로 리스크 없는 완벽한 게임을 추구하게 됐다. LGD에서 리스크 있는 운영을 다시 익힌 뒤로는 그런 플레이로부터 부담감을 거의 느끼지 않게 됐다. 과감한 플레이를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팬들의 비판을 받고, 팀원의 신뢰를 잃는다. 신인 선수는 그런 것에 큰 타격을 받겠지만, 나는 이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연차가 됐다.” (2편에서 계속)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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