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지정학 리스크와 한국 경제
20세기 말에는 누구도 이런 21세기가 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는 ‘역사의 종언’과는 반대로 21세기 초는 어디서 돌풍이 불어올지 모르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큰 사건이 빈발하고 지정학과 경제가 연결되어 판을 뒤흔들고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최근 발간한 『한국이 당면한 지정경(地政經) 리스크』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사안들이 급박하게 움직이며 한반도의 정세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운명은 이 복합위기를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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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우 전쟁 충격 더 커질 수 있어
중국 ‘리오프닝’ 이후는 불확실해
최악 시점에 북한 도발이 겹치면
지·정·경 ‘퍼펙트 스톰’ 올 수도
」
상황이 이런데도 아직 우리는 지정학과 경제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 서투르다. 국제관계와 안보 전문가는 지정학적 사건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 경제 부처나 연구소는 ‘다른 모든 여건이 동일하다(ceteris paribus)’는 전제에서 경제를 예측한다. 지정학 리스크가 커져도 계속 ‘세테리스 파리부스’다. 더욱이 우리 정치는 분열적이며 정부 조직은 분절적이다. 사소한 사건을 정쟁으로 만드는 데 기민한 정치권은 리스크의 사전 진단과 대비를 오히려 방해한다. 지정학 충격이 경제로 파급되고 여기다 금융 교란까지 더해지면 ‘퍼펙트 스톰’이 될 수 있는 데도 우리는 한가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확전 없는 조기 종전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은 유럽과 협력하여 2021년 말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대비한 경제제재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책은 포함하지 못했다. 광물 수출 자체를 막은 대북 제재와 달리 러시아의 주력 수출품인 유류와 가스의 수입 금지를 포함하거나 가격을 생산원가 이하로 떨어뜨리는 방안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유럽 경제에 미칠 충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인도·튀르키예 등의 수입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 산유국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가가 생산원가인 40달러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당분간 러시아의 전비 조달에 큰 문제가 없다. 따라서 이 ‘슬픈 전쟁’은 올해도 끝나기 어렵다. 오히려 끝나기 전 더 큰 지정학 충격을 몰고 올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올 하반기의 금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전쟁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민주주의 대 전제주의의 대결로 규정한 서방은 푸틴에게 승리를 안겨줄 생각이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도 이 상태에서의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양쪽 모두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강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할 수 있다. 올해 날씨도 변수다. 유럽이 혹서나 혹한을 맞는다면 에너지 가격은 더 뛸 수 있다. 만약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더 넓은 지역 혹은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러시아 곡창 지역으로 확대된다면 곡물 가격이 급등할 것이다. 이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올 하반기에도 정책 당국이 금리를 내리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중국 시장의 ‘리오프닝’이 몰고 올 긍정적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않을 것이다. 구조적, 정책적, 지정학적 요인이 다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술력 향상으로 한국 제품의 수요는 구조적으로 줄었다. 내수 확대에 방점을 두는 중국의 쌍순환 정책은 한국의 수출 증가를 제약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는 미·중 간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의 규제에 따라 한국이 첨단 반도체의 대중 수출이나 투자를 중단한다면 중국은 2차전지의 원재료나 희토류의 수출 통제로 보복할 수 있다. 2007~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후 중국이 세계 경제 회복을 견인하던 시대가 다시 오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이다. 중국이 바뀌었고 세상이 변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파악된 미지수’다. 그 자체로선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지정학 위기가 커진 데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때 북한의 거센 도발은 한국경제에 비대칭적 충격을 줄 수 있다. 위험한 시대에 굳이 위태로운 나라에 투자할 필요가 있겠냐며 외국인들이 한국 시장을 대거 이탈할 개연성도 있다. 그 결과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 금리를 인상해 이를 막아야 한다. 수입 물가가 오르니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서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금리 인상은 경제를 위축시키며 자칫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한국의 경제정책은 고공에서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위험을 동반한다.
경제가 하반기에 크게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의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치 1.5%도 중간이 아니라 상단으로 판단된다. 성장률보다 우리 정부와 기업은 ‘새로운 ESG(energy·supply-chain·grain, 에너지·공급망·곡물)’를 주목해야 한다. 이 위험한 지정학 시대에는 성장보다 버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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