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전세사기·역전세라는 대혼돈
‘주거 안정의 사다리’로 여겨졌던 전세가 시장의 문제아가 됐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속출하면서다. 집값 하락에 따른 ‘깡통 전세’와 역전세로 인한 보증금 미반환 사례까지 얽히며 전세사기 논란은 그야말로 혼돈의 양상이다. 피해자와 야당 등은 정부의 ‘선 보상’ 같은 적극적이며 신속한 개입을 주장하지만, 조금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전세를 둘러싸고 빚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은 호기로웠던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부메랑이다. 핀셋 대책은 풍선 효과를 낳았고, 집값이 다락같이 올랐다. ‘영끌’로 집을 사는 사람이 늘고 전셋값이 덩달아 뛰자 주거 안정을 위해 2020년 7월 임대차3법을 강행했다. ‘임차인=약자’라는 프레임 속 세입자의 권한을 강화한 계약갱신청구권은 전세값 급등을 더 부추겼다. 2년이 아닌 4년간 발이 묶일 수 있다는 우려에 집주인은 전셋값을 확 높였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인 2017년 5월 3억8415만원이던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는 2022년 1월 6억3424만원까지 급등한 뒤 지난 3월 5억1444만원을 기록했다. 집값 하락과 함께 전세가도 조금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뛴 전셋값을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전세자금대출이다. 집값을 잡기 위한 각종 정책과 대출 규제에도 전세대출은 무풍지대였다. 전세보증금의 80%(신혼부부나 청년 맞춤형 전세 등은 90%, 4억원 한도)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고 주택담보대출에 적용되는 가장 강력한 규제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서도 전세대출은 비켜 있었다. 서민 주거 안정이란 명분은 전세대출에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 결과 전세대출은 시장에 새로운 거품을 만들었다. 전셋값이 오르면 자신이 손에 쥔 돈에 맞춰 더 싼 집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은 손쉽게 빚을 내 전세 계약을 맺었다. 전세계약이 끝나면 새로운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으로 원금을 상환하면 되니 이자만 내면 되는 셈이었다.
전세가격이 집값의 70% 넘는 수준까지 치솟자, 전세자금 대출을 지렛대 삼아 집주인은 ‘갭 투자’의 사다리를 올라탔다. 모두 행복한 시나리오 속 전세대출은 급증했다. 금융권 등에 따르면 2020년 1월 101조원이던 전세대출은 지난해 12월 기준 170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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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차3법과 무분별 전세대출
문 정부 부동산 정책의 부메랑
정부 보상안, 시장 왜곡할 수도
」
집값 상승 신화에 기대 빚으로 쌓은 모래성이 무너지자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빌라왕’이 주도한 조직적인 전세사기는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는 범죄로 모습을 드러냈다. 집값이 떨어지며 전세가격이 매매가를 앞지르고, 기존 세입자에게 신규 계약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운 역전세 현상으로 고통을 겪는 임차인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이 채권을 매입해 세입자에게 피해금을 우선 보상한 뒤 경매와 공매·매각 등을 통해 투입 자금을 회수하는 내용의 특별법 추진에 나설 태세다. 이른바 ‘선 보상, 후 구상권 청구’다. 이에 편승하려 슬그머니 보증금 미반환까지 전세사기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조짐도 엿보인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전세와 관련해 정부의 보상을 불러내려는 시도는 많은 위험과 논란거리를 내포한다. 전세계약 관련 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수 있는 데다, 정부 보상을 노리고 전세사기를 빙자한 또 다른 범죄를 불러올 수 있다. 무엇보다 사인 간 거래에 정부가 어느 수준까지 개입할 것인지와 다른 사기 피해에 대한 형평성 논란까지 불거질 수 있다.
정부도 선을 긋고 나섰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24일 인천 전세사기피해자지원센터를 찾아 “사기 피해 금액을 국가가 먼저 대납해서 돌려주고, 회수되든 말든 떠안으라고 하면 사기 범죄를 국가가 떠안을 것이라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세사기 피해와 집값 하락기에 나타나는 보증금 미반환 현상을 어떻게 구분 지어 어디까지 국가가 관여하고 지원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우선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거 안정 방안을 마련하고, 사기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피해금 환수 등에 나서는 것이다. 전세 관련 제도 보완 등의 후속 조치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감정에 휩쓸린 보상 등 섣부른 개입에 나서는 건 또 다른 시장 왜곡과 정책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 본격화하는 ‘역전세 쓰나미’에 잘못된 정책의 부메랑은 이미 충분히 맞고 있지 않나.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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