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아직은 달러 대체할 통화 보이지 않는다
인도는 러 석유 루블화로 구매
달러 거래량 압도적 1위지만
준비통화 비중은 58%로 하락
미 달러 무기화, ‘탈달러’ 자초
그래도 ‘킹 달러’ 수십년 더 갈듯
도전 받는 달러 패권
브라질·러시아 위안화 늘려가
인도는 러 석유 루블화로 구매
달러 거래량 압도적 1위지만
준비통화 비중은 58%로 하락
미 달러 무기화, ‘탈달러’ 자초
그래도 ‘킹 달러’ 수십년 더 갈듯
‘달러 패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다시 등장했다. 몇 가지 사건이 겹쳤다. 등장인물부터 화려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스포트라이트의 주역이다.
룰라 “달러 세계 지배 상황 끝내야”
먼저 라가르드 총재의 지난 17일 미국 외교협회 연설. 그는 “몇몇 국가들이 중국 위안화나 인도 루피화 같은 대체 통화의 사용을 늘리려고 한다”며 “달러화나 유로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앞서 13일엔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중국 상하이 신개발은행 발언이 있었다. 그는 “달러가 세계무역을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브라질과 중국의 밀착은 눈부실 정도다. 룰라 대통령과 시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전면적 동반자 관계”라고 선언했다. 두 나라는 양국 간 수출입 결제와 금융 거래에 달러화 대신 자국 통화인 위안화와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ㆍ스위프트) 대신 중국이 만든 ‘국경간 위안화 지급 시스템’(CIPS)을 이용하기로 했다.
중국과 사우디의 접근도 만만치 않다. 시 주석은 지난해 12월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당시 시 주석은 걸프 산유국들의 석유와 가스를 위안화로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원유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는 미국과 사우디 간 ‘페트로 달러’ 체제를 뒤흔드는 제안이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다. 아직 사우디와 중국 간 석유 거래가 위안화로 결제됐다는 소식은 없다. 그러나 양국 간 위안화 사용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최근 중국 수출입은행이 사우디 국영은행에 위안화 대출을 했고,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중국 석유화학기업 룽성석화 지분 10%를 매입하며 위안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밀월도 뜨겁다. 시 주석은 지난달 러시아를 국빈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전방위적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서방 제재로 고립된 푸틴은 중국과의 교역이 절실했고, 시진핑은 원유 생산대국인 러시아의 위안화 결제가 필요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위안화를 러시아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약속했다.
남미의 경제대국 브라질, 중동 산유대국 사우디,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묶고 있는 일련의 사안들은 모두 달러화를 위안화 등 다른 통화로 대체하려는 흐름 위에 있다. 중국 염원대로 위안화 국제 위상은 강화되고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구도다. 앞서 인도는 지난해 연말부터 러시아산 석유를 러시아 루블화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라가르드 ‘탈달러화’ 움직임 경고
라가르드 ECB 총재가 ‘그림자 국무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미 외교정책 본산인 외교협회에서 “달러화 기축통화 지위를 당연시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은 중국ㆍ러시아ㆍ사우디ㆍ인도 등에서 펼쳐지고 있는 ‘탈달러화’ 움직임을 경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달러화의 패권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흔들리고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통계부터 보자.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전 세계 외환거래의 88%(쌍방 거래의 총합은 200%)가 달러화로 이뤄진다(2022년 기준). 반면 다른 통화는 한참 못 미친다. 유로화 거래 비중은 31%. 2010년 39%에 비해 떨어졌다. 중국 위안화 비중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긴 했다. 20년 전의 1% 미만에서 7% 이상으로 올랐지만, 존재감이 크지는 않다. 이게 다가 아니다. 스위프트(SWIFT) 결제망에서 사용된 달러화 비중은 지난 1월 기준 45.4%로 굳건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2위인 유로화가 33.3%, 엔화 4.3%, 위안화 1.3%였다.
또한 국제 차입과 무역 거래의 약 절반이 달러화로 진행된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어떤 통화도 아직은 달러화에 견줄 바가 못 된다.
외환거래 88%, 무역거래 절반이 달러화로 이뤄져
그런데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액 중 준비통화의 비중 변화 추이를 보면 조금 다른 양상이 드러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2년 4분기 달러화가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8.4%로 단연 1위다.
그러나 2001년 4분기엔 이 비중이 71.5%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65% 아래로 떨어졌고, 2020년 4분기 이후 60% 밑으로 내려갔다. 20년간 10%포인트 이상 하락한 것이다. 반면 유로화는 같은 기간 19.2%에서 20.5%로, 엔화는 5%에서 5.5%로 근소하게 올랐다. 위안화는 2022년 4분기에 2.7%를 차지했다.
통계를 종합하면 몇 가지 그림이 보인다. 하나는 달러화의 압도적 지위는 여전하긴 하지만, 달러화의 영토를 조금씩 다른 통화가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스티븐 젠 유리존SLJ캐피탈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외환 준비금에서 달러화 비중 감소 속도가 지난 20년간 평균의 10배에 달한다는 점을 거론하며 “‘탈달러화’가 놀라운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그림은 ‘탈달러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유로화나 위안화 등 다른 통화가 달러화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로ㆍ엔ㆍ위안, 1위 기축통화 되기엔 한계
왜일까. 달러화 같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선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점에서 어떤 나라도 아직은 미국의 상대가 안 된다. 개방되고 신뢰할만한 자본시장도 필수적이다.
달러화의 최대 강점은 풍부한 유동성이다. 달러화는 지구촌 어디서든 통용된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거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오랜 기간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감수하면서 달러를 세계 곳곳으로 흘려보낸 결과다. 미국 말고 이런 일을 감당할 나라가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다른 통화들은 저마다 약점이 있다. 2위 기축통화인 유로화는 유럽연합(EU)의 통화다. EU는 ECB라는 통화당국을 갖고 있지만, 단일재정당국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엔화의 경우 통화가치에 문제가 있다. 오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와 양적완화를 펼치다 보니 엔화 약세가 고착화했다. 위안화는 중국 당국의 자본통제가 장애물이다. 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금융시장과 재정이 투명하지도 않다.
미국 국제 분야 싱크탱크인 애틀랜틱 카운슬은 “당분간 다른 어떤 국가도 (미국 같은) 기축통화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의지가 없거나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통화 전문가들의 결론은 수렴한다. ‘탈달러화’ 움직임이 부쩍 늘긴 했지만, 달러 패권 시대가 조만간 막을 내리진 않는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킹 달러'가 정말로 왕관을 잃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러시아ㆍ이란, 달러 대안 모색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대안을 찾는, 즉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을 미국이 일정 부분 자초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사례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미국과 EU가 러시아 주요 은행을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한 사건이다. 러시아는 국제 금융·무역 거래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위안화·리라화(튀르키예) 등 제3의 통화로 눈길을 돌렸다. 러시아 수출대금의 위안화 결제 비중은 서방 제재 이전 0.5%에서 16%까지 높아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찌감치 “이런 제재는 달러 지배력에 대한 반발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미국이 이란과 러시아에 심각한 금융ㆍ경제 제재를 가하고 달러 사용을 제한하자 이란과 러시아 및 기타 국가들이 완전한 '탈달러화'에 착수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최근 CNN 인터뷰에서 “달러 역할과 연결된 금융제재를 사용할 때 달러의 헤게모니를 훼손할 위험성이 있다”며 “(그러한 제재는) 중국, 러시아, 이란에게 달러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사용된 ‘달러 무기화’가 달러 패권의 약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군사 개입이 국내외 난관에 부딪히면서 그 빈자리 상당 부분을 금융 제재가 메웠지만, 이 역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럼에도 옐런 장관은 금융제재에 대해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도구”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달러 무기화를 멈출 의사가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반면 미국이 달러화를 패권 유지의 도구로 활용하면 할수록 제재 대상국의 '탈달러화' 움직임은 가속할 것이다. ‘달러 패권’의 운명은 결국 글로벌 패권 경쟁에 달렸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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