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프리즘] ‘진주의 저울’ 형평사 100년
1909년 8월 경남 진주시 진주교회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신분차별 때문에 같은 거주지에서 살 수조차 없었던 백정과 일반인이 우여곡절 끝에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올렸다. 사실관계는 다르지만 이 ‘동석예배’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데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했다. 백정도 다른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렇게 14년이 지난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형평운동) 단체 ‘형평사’가 출범했다.
이 단체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고 선포했다.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UN)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었다.
당시 형평사를 주도한 건 강상호·신현수 등 양반 출신과 장지필·이학찬 등 백정 출신들이었다. 강상호 등은 ‘신백정’이라는 멸시를 받았지만 올곧은 뜻을 꺾지 않았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나섰는데, 그 바탕이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었다. 당시 백정은 사는 곳도 제한받았고, 태어나도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다.
혼인도 백정끼리만 가능했다. 사실상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를 잡고 고기를 다룬다는 이유로 갖은 천대를 받았다. 뿌리 깊은 악습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과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운동을 거치며 신분제도의 변화 여건이 조성됐으나 이때까지도 실질적인 신분차별의 벽은 공고했다.
이런 가운데 형평사 깃발을 세운 형평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백정이 무슨’ 하는 멸시 속에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래 취지를 잃었다.
하지만 형평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여러 사회운동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형평정신은 시대에 따라 모습은 변했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초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서도 그 역사가 조명됐다.
올해는 진주 형평운동이 발현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등은 24~30일을 형평주간으로 지정해 학술회의, 인권영화제, 전시와 공연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한다. 우리도 삶 속에서 공정과 상식의 저울이 기울어진 곳은 없는지 형평 주간을 맞아 되돌아볼 일이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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