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내가 손편지를 벽에 붙여 놓는 이유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혼자 연극을 보았다. 김지숙의 모노드라마 ‘로젤-여자살이’였다. 하필 왜 그 작품이었을까. 정확히 기록하지 않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연극의 대본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팸플릿을 왜 30년째 간직하고 있는 걸까 하면 ‘여자’와 ‘살이’라는 말에 지금껏 붙들려 있어서가 아닐까 짐짓 짐작이나 할 뿐이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칼이 자꾸만 볼에 들러붙는 걸 떼어가며 배우가 족히 5센티미터는 됨직한 큰 글씨로 팸플릿에다 이렇게 써주었다. “그대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시오. 金知淑.” 그대, 삶, 스스로, 선택, 책임, 그리고 제 이름 석 자.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평이한 한 줄의 문장이 꽁꽁 얼어붙은 나라는 바다를 순간 어떻게 깨부수었는지 목울대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데 이는 분명 말할거리가 아니었다. 이는 필시 쓸거리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런 한 문장을 수도 없이 내 것으로 수집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하루는 교과서 밑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깔아놓고 몰래 읽다 들켜 선생님께 그 책으로 머리통을 맞았는데, 그 상황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침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책임과 의무를 다할 네 시간에 대한 최소한 예의는 있었으면 한다. 그때 나는 울었던가 그 눈물은 굵었던가. 선생님이 교복 주머니 속에 넣어준 손편지를 화장실 변기에 앉아 뜯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아우구스티노.”
무명이긴 하나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이후 가끔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쳐보고는 한다. 내 기억에서는 희미해졌으나 누군가의 손에서는 선명할 내 손글씨를 그렇게도 만난다. 사인을 다시 해서 보내드린다고 할까, 그런 심정일 적이 잦아 동네 어디 서예학원이 없나 알아본 것이 십수 년째다. 배보다 배꼽인지, 배꼽보다 배인지, 철없는 나라지만 또 이렇게 배를 탐하다보면 무엇이 중헌지 언젠가는 알리라 한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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