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독립' 실패한 中 보라…한국, 그 공급망에 끼어야 한다 [노정태가 소리내다]

노정태 2023. 4. 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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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이 26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 이후 12년 만에 이루어지는 국빈 방문임에도 이번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미국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에 선물 보따리를 안기긴커녕 자국 중심주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기차 보조금 대상자에서 한국 기업을 배제했다. 물론 미국을 제외한 독일, 일본 등 모든 나라가 겪은 일이나, 미국이 그간 견지한 자유무역주의와는 상충하는 일이다. 미국에서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려면 생산 수율 등 핵심 정보를 담아서 제출하라는 요구 역시 강대국의 독선으로 느껴질 법하다.

미국의 ‘횡포’는 경제 문제뿐만 아니다. 최근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펜타곤 문건 유출 사건 및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문서 유출 사건을 통해 한 차례 드러났던 사실이 또 한 번 확인되었다. 미국은 적뿐 아니라 동맹까지 무차별적으로 도·감청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 일이 드러난 후에도 직접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이 나서서 미국 편을 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중심주의 비판 있지만 탈 미국은 대안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건, 심지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뛰어넘는 ‘독립’을 추구하기 위해서건, 우리가 택해야 하는 방향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더 깊숙이 뛰어들고 참여하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 번역해 출간을 앞둔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의 저서『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의 한 대목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짚어보도록 하자.

1960년대 말, 중국은 문화혁명의 광풍에 휩쓸렸다. 막 걸음마 단계에 접어들었던 반도체 산업도 그 폭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전자공학자, 반도체 기술자들은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하루아침에 연구실을 잃은 그들에게 내려온 지시는 더욱 터무니없었다. “인민의 반도체를 만드시오!” 그리하여 중국은 ‘잃어버린 30년’을 맞이했고, 반대로 한국은 고도성장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중국은 개혁 개방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농민공이 제공하는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가장 단순한 전자제품 조립부터 차근차근 기술 수준을 높여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미국 중심 세계 질서, 특히 경제와 무역 질서에 편입하면서 자신들의 지분을 키워 나가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르자 중국은 알리바바, 텐센트, 타오바오 등으로 대표되는 거대 IT 기업 보유국이 되었다.

문제는 반도체였다. 아무리 IT 기업들이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다 한들, 그러한 IT 산업의 기반을 이루는 반도체가 외국산이면 ‘기술 독립’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은 이전과 다른 경로를 택하기로 했다. 미국 중심으로 짜여 있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 사슬의 일원으로 남아있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반도체 뿐 아니라 소재, 부품, 장비까지 최대한 국산화하는 거대한 투자 계획을 세웠다. 이름하여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계획이었다.

『칩 워』는 2010년대 중국의 야심 찬 ‘반도체 독립’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잘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은 전 세계의 첨단 기업이 만들어낸 성과물을 모두 투입해야 작동한다. 가장 많은 원천 기술을 보유한 미국조차도 반도체 산업을 전부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발 주자인 중국이 단기간의 투자로 그 일을 해낼 수는 없었다.


국제 반도체 공급망서 이탈한 중국의 사례 교훈 삼아야


크리스 밀러는 『칩 워』에서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중국이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 사슬에 참여해 더 큰 몫을 가져가고자 했던 기존의 정책 방향을 10년 이상 유지했다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틀어쥐고자 했던 중국의 야망을 수월하게 달성할 수도 있었다. 중국 시장의 힘으로 미국 기업들을 끌어들이고, 기술 이전을 받으며 시간을 벌어서, 반도체와 소재 부품 장비 분야의 핵심 기술을 중국화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적어도 반도체 공급 사슬만큼은 거부하고자 했다. 반도체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뛰어드는’ 독립 대신 ‘벗어나는’ 독립을 하고자 했다. 그 결과 반도체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중국은 무력을 써서라도 대만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연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는 결국 중국 스스로 결정적인 시점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세계 질서가 반드시 미국 중심의 질서여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하지만 2023년 현재, 군사, 경제,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가 미국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이미 미국과 한미동맹을 맺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불가분의 관계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보자. 일정 수준의 고통을 감수한다면 미국은 경제적으로 한국을 떼어낼 수도 있다. 반면 미국 중심의 국제 경제에서 이탈한다면 대한민국은 자원 빈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독립의 진정한 의미는 벗어나는 것일 수 없다. 오히려 반대다. 세계 질서를 이해하고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독립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국의 ‘반도체 독립’이 실패로 귀결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할 때 독립은 ‘고립’이 되고 만다. 진정한 독립의 길은 역설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더 깊숙이, 기꺼이 뛰어들어 세계와 하나가 될 때 도달할 수 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민족 대표 33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빠르게 편승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독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강대국, 특히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100년 전의 지식인들은 일본보다 더 큰 세상에 뛰어드는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한미동맹은 결혼 같은 것…불만 조율해야


미국이 한국에 여러 불만을 품고 있듯 한국 또한 미국의 모든 요구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동맹은 결혼과 마찬가지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시너지를 창출해내는 과정이다. 이번 정상회담이 한미 양국의 미래에 더 큰 도약의 계기가 돼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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