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대사가 방탄차 몰고 탈출…긴박했던 50시간 '프라미스' 작전
“죽었다 살아난 느낌입니다.”
25일 오후 4시쯤 경기 성남 서울공항. 공군의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 KC-330 시그너스에서 수단 교민 반용우씨(52)는 내린 뒤 약간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공군 수송기를 보자마자 “‘살았다’ 이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 28명의 교민은 귀국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들고서도 마중 나온 가족, 친지의 얼굴을 마주하자 밝은 표정들이었다.
‘프라미스(Promise·약속)’로 불리는 수단 교민 대피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교민과 공관 직원, 고양이 2마리와 개 1마리까지 모두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다.
이는 당국의 과감한 결단, 우호적 외교관계, 군의 준비태세 등 3박자가 어우러진 결과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작전을 "이번 철수가 성공하면 다른 어떤 작전도 해낼 수 있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최고 난이도의 위기 상황'이었다"며 “외교전의 종합판이었다”고 말했다.
프라미스 작전의 기본은 정세 판단이었다. 외교 당국은 지난 15일 군벌 간 유혈 충돌이 벌어지자마자 사태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고 철수를 먼저 고려했다. 기준 시점은 이슬람의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끝난 뒤 사흘간의 명절 '이드 알피트르'(21∼23일) 시기였다. '디데이(D-day)'로 정한 23일을 넘기면 교전이 격해져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을 떠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본 것이다.
9개 지역에 머물던 수단 교민을 대사관에 모이게 하는 것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난무하는 총성 속 대사관 직원조차 시장에 고립돼 5일간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휴전 기간에도 곳곳에서 총성이 이어졌고, 군인들이 주둔한 검문소는 500m 간격으로 이어져 10분 거리를 30~40분이 걸릴 정도로 이동이 쉽지 않았다. 통신 상황은 비교적 양호했지만, 전력이 모자라 배터리가 나가는 게 문제였다. 건물 안에서 인기척을 내면 폭격이나 약탈을 부를 수 있어 발전기도 돌리지 못했다고 한다.
집결이 시작된 이드의 첫째 날 대사관의 행정직원이 나서 교민들을 데려왔지만, 그간 누적된 과로로 이튿날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교전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남궁환 주 수단대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탄 차를 타고 22일 대피 인원 전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정부는 그동안 탈출 경로를 짜야 했다. 대사관에서 1.5㎞ 떨어진 하르툼 공항을 두고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벌여 하늘길은 선택지에서 자연히 제외됐다. 육로밖에 남지 않은 막막한 상황에서 아랍에미리트(UAE)·튀르키예·프랑스는 물론 UN으로도 피란길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왔다. 외교부 관계자는 “특히 튀르키예는 ‘지난 2월 지진 발생 때 받은 도움을 보답하고 싶다’고 전해왔다”며 “우리가 (국제사회에) 한 만큼 다 돌아온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평상시 쌓아놓은 우호 관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부의 최종 선택은 UAE였다. UAE는 현지 세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정보의 수준도 높아 한마디로 ‘믿을 만한 친구’였다. 정부는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외교·국제협력부 장관,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아부다비 행정청장 등과 지속적으로 협의했다. 특히 칼둔 청장은 지속 소통하던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Your people are our people(당신네 국민은 우리 국민)"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대사관에 모인 이들은 대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UAE 대사관으로 이동한 뒤 포트수단행 버스에 올랐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사관에서 컵라면이 사실상 유일한 식량이었고 하르툼에서 포트수단까지 1100㎞가 넘는 거리를 버스로 이동할 때는 미리 싸둔 김밥을 먹으며 버텼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 측이 제공한 에스코트 차량이 교민들이 탄 버스를 호위했다.
한국, UAE, 일본, 말레이시아 등으로 구성된 이 다국적 피란 그룹은 23일 오후 1시 10분(이하 한국시간) 하르툼을 떠나 33시간을 넘긴 24일 오후 10시 40분에 포트수단에 도착했다. 안전한 경로를 찾아 최단거리로 800㎞나 되는 길을 우회해 1174㎞를 달린 데다 중간에 그룹 내 다른 차량이 말썽을 일으켜 늦어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포트수단에 교민들이 도착하자마자 공군 C-130J 수송기가 이륙할 때까지 45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신속대응팀이 미리 포트수단에 투입돼 출입국 절차를 완료해둔 덕"이라고 말했다.
군사 작전도 만일을 대비하며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21일 공군 수송기 C-130J '슈퍼 허큘리스'는 출격 명령 3시간 만에 이륙 준비를 마치고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 대테러 특수임무대와 공군 공정통제사(CCT), 경호요원, 의무요원 등 48명을 태운 뒤 현지에 급파됐다. 이후 23일 KC-330도 추가 투입됐다. 군 관계자는 “정상적인 절차로는 16개국 영공통과에 2주 정도 소요되지만, 이번에 1일 만에 완료했다”며 “이건 우리의 국가 역량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포트수단에 미리 도착해있던 C-130J은 24일 오후 10시 28분 이륙해 11시 8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에 착륙했다. 이 시간 소말리아 해역 호송 전대 청해부대의 충무공이순신함이 오만 살랄라항을 떠나 수단 인근 해역에 대기했다. 비상시 바닷길도 대안으로 준비했다.
교민 대피 임무를 이어 받은 KC-330은 25일 오전 2시 54분에 떠 이날 오후 3시 57분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하르툼을 떠나 약 51시간에 걸친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이종섭 국방부 장관, 이도훈 외교부 2차관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맞이했다. 이들과 함께 귀국한 남궁 대사는 “대사관의 지휘를 믿고 따라준 수단 교민의 지원이 없었다면 무사 귀환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며 “프로정신에 입각한 대사관 직원들의 철저한 구조 활동 결과라 생각한다. 10여일 넘는 기간 함께 한 직원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근평·박현주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서울공항=국방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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