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이 손잡고 그은 선... 아직도 남한 곳곳에 있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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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
| ⓒ 윤태옥 |
휴전선과 38선은 다르다. 한국전쟁은 38선에서 시작했고 휴전선에서 멈춘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강화 교동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휴전선 답사여행을 5박6일씩 두 번이나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의 현대사 지식이라고는 습자지보다 얇아 물 한 방울에도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여러 군데 흩어져있는 38선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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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453-1의 38선 표지석 |
| ⓒ 윤태옥 |
북위 38도임을 표시한 첫 번째 실물 표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453-1(청정로 188번지)에 있다. 371번 도로의 길가라서 찾기 쉽다. 커다란 자연석에 '아! 38선'란 문구를 큼직한 글씨로 음각한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통구리 동쪽으로 가면서 GPS로 38도 지점을 더 찾아봤다.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 황우마을 앞길도 38도였다. 조금 더 동쪽으로 진행해서 파주군 전곡읍 양원리의 어느 골프장 근처, 밋밋한 고개에서도 38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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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초성리의 38선 돌파 기념비. |
| ⓒ 윤태옥 |
38선돌파기념비 옆 철로 가까이에는 큼직한 자연석으로 세운 38선 표지가 있다. 그 앞에는 반들반들한 화강암으로 만든 안내표지가 있다. 그런데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큼직한 38선 표지가 아니고 그 바로 옆에 있는 깨지고 낡은 콘크리트 설치물이다. 상단은 잘라진 채 땅바닥에 놓여 있고 기단은 제자리에 박혀있다. 안내문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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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
| ⓒ 윤태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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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
| ⓒ 윤태옥 |
이 파손된 38선 옛 표지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미국과 옛 소련의 합의 하에 세워진 38선 표지석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 인민군과 탱크를 앞세우고 이 길로 남침하여 수많은 우리 국군과 민간인까지 비참하게 희생되게 했던 피로 물든 6.25전쟁으로 인해 역사적인 이 38선 표지석이 파손되어 있던 중 1991년 9월 17일 당시 군수였던 홍성규 연천군수께서 바로 그 옆에 38선 경계비를 다시 건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루게 되었다. 파손된 옛 38선 표지석은 파손된 상태로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2016년 4월 일
대한민국 6.25참전기념자회 연천지회
이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 파손된 38선 표지이다. 1945년 미군과 소련군이 협력해서 세운 38선 표지이다. 안내문은 조금 어색했다. 연천의 한 단체가 이 지역 인사의 공덕을 선양하는 사적인 기념물인지, 연천군이 역사유적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역사유적이라면 개인에 대한 존대어는 삼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안내문 전체의 5분의 4가 한 문장이라 읽기도 조금 거북하다. '이루게 되었다'는 말도 어색하다.
오래도록 보존하여 보여줄 것은 옛 38선 표지이고 안내문은 보조적인 것인데 안내문 표지를 너무 가까이 세운 탓에 사진에 담기도 불편하다. 안내표지가 옛 표지석보다 너무 멀끔해서 첫 시선은 그쪽으로 끌려간다. 주객이 바뀐 느낌이다.
38선은 우리가 그은 선이 아니다. 책임을 방기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더 크게 받아들여야 할 통탄스런 일이다. 아무튼 누군가 선을 그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 그러니 그들 두 나라의 군대가 합의하여 직접 설치한 표지야말로 역사적 사실에 가장 부합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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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에 남아있는 38선 표지석 위치 |
| ⓒ 봉주영 |
휴전선 답사여행에 나서면서 미군과 소련군이 직접 설치한 38선 표지가 실물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지도에 38선돌파기념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가 뜻밖에 진짜 역사 유물을 만난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가슴도 막혀왔다.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분할점령기로 치환된 바로 그 엄청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작은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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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선 표지(출처 미확인) |
남의 땅을 분단하는 선을 당사자에게 단 한 마디도 없이 찌익 긋고는 분계 표지를 당당하게 설치했다. 이렇게 점령군들이 합동으로 설치한 실물 표지 앞에서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말로는 해방군으로 왔다고 해도 엄연한 점령군이다. 38선 표지가 설치되면서 미군과 소련군의 초소가 각각 세워졌을 것이다. 남북의 통행이 당장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38선으로 남과 북이 구분된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다니던 길이 이제 외국군의 검문을 받아야 통과하는 지점으로 바뀐 것이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전쟁이 끝나면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잘 알려진 대로 '적절한 시기'에 독립하는 것으로 합의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 이와 함께 어느 한 국가에 의한 군사적 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발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조선에 중앙집권제 방식의 군정청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뒤에 열린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두 나라는 이미 조선의 독립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을까.
1945년 8월 6, 9일 일본에 원자탄이 잇달아 투하되고, 8월 9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는 바로 만주로 들이닥쳤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일본은 8월 10일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연합국의 예상에 견주자면 돌발적인 사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미국은 한반도의 일본군에 대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미군과 소련군이 무장해제를 하는 방안을 서둘러 제시했고 소련이 바로 동의하여 확정되었다. 실제로 지도 위에 38선을 처음 그은 인물은 당시 미국 전쟁성(국방부)에서 일하던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월 7일에는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를 자신의 권한으로 시행하며,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인들의 희망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9월 9일, 진주군 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을 접수했고, 총독부 청사에는 오후 4시 반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이로서 미국의 군정 3년이 시작되었다.
소련군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김원봉이 주도하여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지휘부와 본대가 따로 움직였다. 본대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타이항산의 팔로군과 합작하면서 만주 방면으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일제가 항복하자 조선의용군 독립지대가 선양에서 조직됐다. 얼마 후 관내에서 이동해온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병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개편했다. 이들은 선양에서 안동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너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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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와 영어, 러시아어로 각각 쓰여져 있는 38선 표지.(출처 미확인) |
조선인 마쯔야마 군수의 "조선독립만세"
이렇게 해서 일제강점기는 미소 양국의 점령기로 넘어갔다. 극소수의 조선인들은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8월 14일 초저녁에 조선군 참모부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달받았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총독부 정무총감의 관저로 와달라는 연락도 받았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이라고 방송을 했다. 도시는 물론 시골의 읍내 수준에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퍼져나갔다. 왕래가 드문 시골에서는 하루이틀 늦게 전해지기도 했다.
강원도 김화읍에서 아이들은 자맥질을 하면 놀다가 일본의 항복방송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들은 당장에는 무덤덤했으나 저녁이 되어서야 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아이는 그날 저녁을 먹고 난 뒤 엄마가 '몸뻬'라고 하는 일본식 바지를 벗어던지고 흰 치마저고리로 갈아입는 게 의아스러웠다. 엄마를 따라 군청 앞 공터로 가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흰색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청 현관의 상자 위에 흰색 셔츠 차림의 남자가 올라가 조선어로 목청 높여 연설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마쯔야마 군수였다. 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국방색이나 검정색 정장이 아닌 흰 셔츠 바람으로, 게다가 조선말로 연설하다니. 아이는 이때 비로소 해방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군수는 어제까지만 해도 황군신민과 내선일체와 옥쇄를 부르짖던 사람이었다, 그런대 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아이도 세 번이나 따라 외쳤다. 마쯔야마 군수는 그날 밤 군청의 현금 뭉치로 가방을 채우고는 경성으로 도망쳤다는 소리가 돌았다. 그 아이는 훗날 언론인이 되는 임재경으로, 그의 회고는 그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해방은 시작이었고 시작은 아직 반이었다.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해방이지만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이 나머지 반이었다. 35년이나 강점되었다가 다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복잡할 수밖에 없다. 향후의 정국 전개를 불안해하는 사람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분단이 되고 그것이 내전과 국제전이 결합된 참극으로 치닫게 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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