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아래서 신학대 구성원은 어떻게 싸웠나
[김민수 기자]
▲ 책 <서서 죽기를 원한 사람들> 표지 이미지. |
ⓒ 대한기독교서회 |
이 책에서는 먼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시절의 학생운동과 민중교회 운동을 살펴본다. 당사자의 증언과 당시 언론 기사와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한신 구성원 혹은 개인의 주관적 관점을 넘어 객관적인 역사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긴박했던 상황 속에서 한신 구성원들이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는지, 특별히 신학대학으로서 역사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이 책에는 녹아있다.
'에필로그'에는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을 간략하게 기술하면서, 1986년 건대애학투(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까지 언급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한국신학대학 민주화운동사'를 넘어 한국 민주화운동의 과정을 보도록 안내한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길도 제시한다.
이 책을 역은 '한신민주화운동동지회'는 동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책은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한 그 무엇을 지녔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목숨 걸고 따리라 다짐하던 젊음의 기록입니다. 어두운 군부독재의 지배 아래서 기장의 훌륭한 스승, 선배들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는 모두가 하나 되어 그 길을 갔습니다. '한국신학대학'이라는 작은 대학에서 큰 일을 벌인 우리의 진지한 고민은 무엇이었고 그 고민 끝에 다다른 고백적 결단은 또 어떻게 내려졌는지, 그리고 그 결단의 처음과 끝을 오롯이 감당한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1951년 신학교 중에서 최초로 정식 대학 인가를 받은 한국신학대학은 1960년 4.19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역사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이후 1965년 한일협정 비준에 대한 반대투쟁과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반대 등 주요한 사안들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어 1967년 6.8 부정선거와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와중에 1970년 전태일의 죽음,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등을 겪으면서 수도권도시선교를 위한 빈민운동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신대학이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린 '하나님 선교(Missio Dei)'의 이상을 한국 땅에 구현시키기 위한 신앙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것은 후에 198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홛동했던 '민중교회운동'의 정신적인 모태가 되었다.
1971년 하반기부터 재야운동이 점점 민주, 민권운동으로 모양새를 갖춰갔고, 학생들은 고련 반대와 부정부채 규탄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강경일변도로 돌변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고려대를 필두로 학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납치하고, 군부대로 데려가 폭행하는 사건들까지 발생한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 명령'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작은 규모의 한신도 60여 명의 학생이 교련 수업을 거부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 수 200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그해 10월 13일, 한신 학생 20여 명이 '국회의원 조찬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세종호텔에 부정부채 규탄시위를 열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시대에 교회가 회개를 촉구하기는커녕, 정치권력과 야합하고 현상유지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항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참에 확실하게 쓴 맛을 보여주고자 문교부를 통해서 몇몇 학생들의 제적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는 6차례에 거쳐 반대했지만, 결국 군인들에 의해 학교 채플실까지 군홧발에 처참히 짓밟히면서 학교는 자진 휴업을 결정하여 문교부에 보고했다. 결국, 위수령 사태는 학생 81명의 자퇴와 기약할 수 없는 휴업으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작은 대학 하나가 독재정권이 동원한 군대와 당당하게 맞선 사건이 라디오에 생중계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젊은이들이 한신을 동경하고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1972년 10월 17일 유신독재의 시작은 다시금 유신철폐 시위를 불러왔고, 한신대는 교수 10여 명이 삭발투쟁을 하고, 학생들은 단식에 돌입하고, 이어 90여 명이 삭발을 하고, 여학생들은 단발을 했다. 이때 <한신동지가>라는 노래가 보급되었다. 이전부터 수도권 운동현장에서 불렸던 노래를 개사한 것이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우리들은 한신동지 좋다 좋아...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한신 동지!'
책 제목 <서서 죽기를 원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왔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울 때에도 불렸던 노래였다. 이렇게 교수와 학생들이 일심동체로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전통은 필자가 한신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 학내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학생들과 교수들 간의 갈등이 불거져 지금은 교수와 학생간의 끈끈한 연대가 이전만 못한 점은 아쉬운 점이다(필자의 사적인 의견).
그 외에도 현장실습을 목적으로 20여 명의 학생들이 구로공단에 신분을 감추고 노동 체험을 하기도 했고, 일본인들의 '기생관광' 반대시위 등과 더불어 긴급조치시대가 도래하자 반유신운동의 최전선에 선다. 유신 선포 2주년인 10월 17일에는 전교생이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예배실에서 '민주주의 장송 추모예배'를 드리고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 이후,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항쟁까지 한신대는 역사 속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고자 했고, 박정희 독재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양적인 부흥을 이루지 못했지만, 역사 속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외형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 속에서 '서서죽기를 원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릎 끓고 사느니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는 '한신동지가'를 거리에서 함께 불렀던 경험을 가진 필자에게 한신대학은 큰 자랑거리다.
지난날에 대한 성찰과 조명은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이다. 아직 우리의 싸움을 끝나지 않았고, 다시 깃발을 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신학대학 민주화운동동지회에서는 '책을 펴내며'에서 '이 책은 단순히 한신대학의 과거를 자랑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라 E.H. 카가 말했던 것처럼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깊이 이해하고 미래를 조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밝힌다.
한국신학대학 민주화운동사이지만, 1960-1980년 급변하던 한국사회에서 작은 대학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광화문 태극기류의 기독교인들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교인들, 양적인 성장에 사활을 걸고 있는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이 책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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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한국신학대학 민주화 운동사 <서서 죽기를 원한 사람들> 출판기념회는 오는 5월 1일 오후 4시부터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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