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보 하루천자]국내 ‘쓰기’ 문화 한눈에…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열기
"예년 대비 20%가량 참가자 늘어"
만년필로 매일 일기 쓰는 80대부터
클래식한 맛에 빠진 2030까지
다양한 쓰기 문화 엿보는 장
"만년필에는 키보드를 치는 것과는 또 다른, 좋은 느낌의 매력이 있죠. 비싼 취미가 아니라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는 만년필도 이제 많아졌어요."
지난 22일 오후 찾은 서울 중구문화회관 3층 대강당은 60개에 달하는 부스가 공간을 채운 가운데 그 사이의 틈도 모두 사람으로 메워진 모습이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4년 만의 '서울 봄 펜쇼'가 열렸다. 2010년 처음 시작된 이후 이듬해부터 매년 2회 봄과 가을 한번씩 열려왔지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여파로 2020~2021년 2년 간은 열리지 못했다. 지난해 재개됐지만 6월에 열리며 봄이 아닌 '여름 펜쇼'로 진행됐다. 행사를 주최한 만년필 동호회 인터넷 카페 '펜후드'는 일정을 되살려 오는 11월에는 가을 펜쇼로 이 열기를 이어갈 에정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날 현장을 찾은 총 인원은 620여명에 달한다. 펜후드를 운영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만년필 애호가로 꼽히는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은 "코로나19 이전의 봄 펜쇼에 보통 400~500명가량이 방문했으니 20%가량 참가자가 늘어난 셈"이라며 "피가 다시 도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에도 펜쇼를 다시 개최했지만 이번은 마스크를 자유롭게 벗게 되면서 한층 활발해진 느낌"이라며 "국제적 교류도 이뤄지는 게 펜쇼의 장점이었는데, 지난해에는 외국에서는 거의 오지 못했다면 이번에는 프랑스, 홍콩, 일본 등 해외에서도 찾아왔다"고 귀뜸했다.
만년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참가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000종이 넘는 만년필 콜렉션을 갖췄다는 김용환씨(82)는 "6·25 전쟁 이후였던 어린 시절에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만년필이 오히려 가장 구하기 쉬운 필기구였다"며 "이것저것 써보고 싶어 모으다보니 1000자루에 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만년필은 일생의 동반자기도 하다. 그는 "4·19 혁명 등 역사적 순간들부터 다양한 경험들을 만년필을 통해 일기로 기록해오고 있다"며 "만년필로 써온 나의 역사를 정리하는 게 꿈"이라고 전했다.
눈에 띈 점은 나이 든 사람의 취미로 여겨지기 십상인 만년필 행사임에도 2030 세대나 아이을 데려 온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만년필 덕후인 엄마아빠를 따라와 신기한 듯 직접 펜을 쥐어보는 아이들 사이를 젊은이들이 헤쳐 지나가는 모습이 쉽게 보였다. 10년 전부터 만년필을 써왔다는 유재호씨(36)는 만년필은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유씨는 "키보드를 치는 것과는 또 다른, 좋은 느낌의 매력이 만년필에 있다"며 "클래식한 맛이 있다보니 자신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느낌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흔히들 만년필에 대해 '비싸다' '어렵다'는 인식이 많지만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는 만년필도 최근에는 많이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펜쇼는 이름처럼 펜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다. 중심에 만년필이 있기는 하지만 연필, 샤프펜슬, 메카닉펜슬 등 다양한 필기구는 물론이고 노트, 잉크, 파우치 등 필기 문화와 연계된 다양한 콜렉션이 전시되고 판매가 이뤄졌다. 문화를 알리기 위해 인문학적 내용이나 손글씨 등과 관련한 강연도 이뤄졌다.
박 소장은 "단순히 쓰기나 필사, 수집에 그치는 게 아니라 좋은 필기구를 사용하자는 데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라며 "판매나 콜렉션 전시를 넘어 알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한편 사라져가는 손글씨를 계속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이 모이는 게 펜쇼의 취지"라고 전했다. 주말마다 을지로 만년필연구소에서 무료로 만년필을 수리해주는 박 소장도 부스를 마련해 무료 수리를 진행했다. 정작 행사를 주최한 박 소장도 이날 제대로 부스를 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이들이 수리를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는 등 코로나19 기간 목말랐던 펜에 대한 팬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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