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뒤흔든 정년연장, 韓 논의 본격화될까
현대차 노조 등 노동계, 국민연금 수급 시기에 맞춰 정년연장 요구
경영계 "호봉제에선 불가…임금체계 개편 선행돼야 논의 가능"
대법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로 정년연장 논의 더 힘들어져
현대자동차와 기아 노조가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핵심 쟁점으로 정년연장을 들고 나올 것을 예고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본격화될지 관심이다.
정년 연장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나아가 납부 시기 연장까지 연관된 사안이라 정부와 사용자측, 노동계간 논의가 불가피한 사안이지만, 경영계에서는 임금체계 개편이 선행돼야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과거 정년연장과 연계한 임금피크제가 지금까지 리스크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로 지목된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현대차 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정년연장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최근 400여명의 확대 간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의제’로 가장 많은 66.9%가 정년연장을 꼽은 데 따른 것이다.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기아 노조)는 올해 단체협약(단협) 없이 임금협상(임협)만 진행하지만, 임금성, 고용안정과 함께 단협 조항에 해당하는 정년연장을 핵심 의제로 조만간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요구안을 확정하겠다고 조합원들에게 밝힌 상태다. 현대차와 기아 노조 모두 정년을 현 60세에서 62세로 연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1, 2위 단위 사업장인 현대차와 기아의 정년연장 여부는 산업 전반에 미칠 파장도 크기 때문에 경영계에서도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늘어나는데, 보험료 어떻게 내라고..."
현대차·기아 노조가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근거는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의 연동’이다. 현 시점에서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63세다. 최소한 국민연금 수급 개시 전 해인 62세까지는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의 정년연장 요구는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의 단계적 상향에 따라 앞으로 더 거세지고, 요구하는 퇴직 연령도 더 높아질 수 있다. 2028년에는 64세부터, 2033년에는 65세부터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논의되는 국민연금 개혁 이슈도 정년을 연장하자는 목소리를 더욱 키울 요인이다. 현재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에 따른 국민연금 재원의 조기 고갈을 막기 위한 개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보험요율 인상은 물론, 연금 가입 연령을 64세로 상향하는 방안까지 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금을 64세까지 납부해야 한다면 정년도 이때까지 연장하는 게 상식적이란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상당수 국민들이 60세 퇴직 이후 4년간 무직 상태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정부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최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정년연장 논란도 국내에서의 관련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우리와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정년연장을 강행하는 가운데 노동계가 반발하며 시위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연동된 데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월평균 소득의 62%에 달하는 프랑스의 상황에 기인한다. 은퇴 후 연금으로 노후를 즐길 시기가 늦춰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정년연장에 대한 노동계의 입장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의 연동’은 국내 노동계의 정년연장 요구에 힘을 실어줄 근거가 될 수 있다.
경영계 "직무·성과중심 임금체계 개편 선행돼야 정년연장 논의 가능"
경영계도 정년연장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행 연공형 임금체계를 유지한 상태에서의 정년연장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청년 신규 채용 여력을 급격히 떨어뜨릴 수 있다.
현대차·기아와 같이 업력이 길고 생산직 근로자가 많은 제조업체들이 많이 채택하고 있는 호봉제와 같은 연공형 임금체계는 근속연수가 길수록 임금이 높아지는 구조다. 정년이 연장될 경우 기업들은 초임 근로자의 두 배 이상의 연봉을 받는 최상위 임금 근로자들을 다수 떠안게 된다.
경영계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이 선행돼야만 정년연장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정년 60세 의무화와 동시에 임금체계 개편 의무가 법제화됐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면서 “새로운 정년연장 논의는 임금체계 개편 의무 선행이 필수이며, 유연근무제 확대, 취업규칙 변경절차 개선 등 노동시장 경직성을 완화하는 법과 제도 정비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 경영계에 '나쁜 학습효과 심어줘'
국회는 지난 2013년 권고조항으로 돼 있는 정년을 의무조항으로 바꾸고 60세로 연장한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법안은 2016년부터 공기업과 공공기관 및 300인 이상 사업장에, 2017년부터는 모든 사업장에 전면 시행됐다.
법안 제정 당시 ‘노사 양측이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넣었으나, 각 사업장별 노조가 단협 개정에 반대하면서 임금체계 개편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관련 조항에 근거해 기업들이 정년연장과 함께 도입한 임금피크제에 대해 지난해 5월 대법원이 무효 판결을 내리면서 정년연장에 대한 기업들의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정년연장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향후 근로자가 법적으로 대응하고 법원이 무효 판결을 내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 학습효과가 만들어진 셈이다.
결국 정년연장을 위해서는 기업에만 일방적으로 비용 부담을 강요만 할 게 아니라 노동계는 임금체계 개편을 수용하고, 정부는 개편된 임금체계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식의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 연동된 정년연장 요구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수십년 전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연공형 임금체계는 절대 안 바꾼다고 버티면서 정년만 연장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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